▣ (S47-42)[사념처의 일어남 사라짐 ㅡ 십이연기 & 사식](부산 수행 170321)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앞 부분은 해피스님의 수업보고서를 읽어보시면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 일어남 경(S47:42)
비구들이여, 사념처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설하겠다. 그것을 들어라. 비구들이여, 무엇이 신(身)의 일어남인가? 자량(資糧)의 일어남이 신(身)의 일어남이고, 자량의 소멸이 신(身)의 사라짐이다. 촉(觸)의 일어남이 수(受)의 일어남이고, 촉(觸)의 소멸이 수(受)의 사라짐이다. 명색(名色)의 일어남이 심(心)의 일어남이고, 명색의 소멸이 심(心)의 사라짐이다. 작의(作意)의 일어남이 법(法)의 일어남이고, 작의의 소멸이 법(法)의 사라짐이다.
(4분 57초 ~ 13분 35초)
일단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이 신수심법의 일어남 - 사라짐을 이야기하면서 구체적인 것으로는 무엇을 제시하나요? 신수심법 각각에 대해서 자량(資糧)이고 촉(觸)이고 명색(名色)이고 작의(作意)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의 일어남이 각각 신수심법의 일어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라짐에 대해서는 이 동일한 네 가지(자량, 촉, 명색, 작의)를 말하면서 이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각각 신수심법의 사라짐으로 말하면서 멸(滅, 소멸)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라짐을 멸이라고 제시하는 것에서 뭔가 하여간 포인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되요.
자, 이런 것을 일단 놓고 한번쯤 생각을 해봅시다. 그래요. 아까 말씀하셨던 딱까라는 것이 있지요. 딱까라고 하는 우리 내면의 방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딱까라는 이 방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이야기를 말할 때 부처님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로 말합니다. 물론 부처님 가르침의 대표는 십이연기이지요. 그런데 십이연기만큼 비교적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설해진 것이 십지연기가 있지요. 일단 십지연기라는 개념을 한번보겠습니다.
이 딱까라는 것, 딱까 이것을 우리가 표현하는 방법이 있지요. 딱까가 무엇안거? 라고 하면 딱까는 갈애가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이차인식에서 상(想)이 병들어(병든 상을 번뇌라고 함) 찟따가 난디를 만들어 갈애가 됩니다. 그래서 ‘딱까라는 내면의 방이 무엇인가요?’ 하면, ‘갈애의 형성과정입니다.’ 라고 말하지요.
그런 가운데 ‘갈애’라는 것은 사실 ‘행위하는 마음의 오염상태’, 이렇게 봐야겠지요. 그러면 이 갈애라는 것이 ‘위딱까’에서 다시 ‘의도-기대-지향’의 과정을 거쳐 ‘사유’로 갑니다. 그러면 이 사유가 ‘욕탐’이라는 중간 과정에 의해서 힘을 받으면 ‘신업과 구업’이라는 행위를 하지요. 그리고 ‘사유’와 (칠판에서) 여기서(갈애에서) 함께 나오는 ‘견해’하고를 합해서 ‘의업’이라고 하지요. (칠판에서) ‘신구의(身口意) 삼업’과 (칠판에서) ‘위딱까로부터 의도-기대-지향’, 이 전체 영역이 사실은 ‘행위’라고 부르는 영역인 거지요.
그런데 이 행위(‘신구의 삼업’ + ‘위딱까, 의도-기대-지향’)가 오염되면 어떤가요? 즉 행위의 오염 때문에 어떤 일이 생기나요? 한면으로는 ①상(想)이 잠재하지요. 그리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②식(識)이 머문다입니다.
갈애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오염’이라는 것과 연결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행위의 오염은) 갈애라는 오염된 마음이 행위를 하므로 행위가 따라서 오염되었다는 개념이지요. 그리고 그 오염된 행위 때문에 식이 머문다입니다.
그럼 머문 이 식(識)은 (이제) 어떻게 설명되나요? (칠판에서) 이 앞에 와서, 명색(名色)과 식(識)이라고 하는 서로 조건되는 이 두 가지, 이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식과 명색이니까 대충 말하면 오온(五蘊)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식과 명색이라는 이것은 무엇인가요? ‘삶의 과정이 누적되어 있는 덩어리’이지요. 그래서 식온(識薀)이라고 부르는 것도 삶의 과정이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어 있는 덩어리라는 거잖아요.
(아까 말한 오염된 행위의 결과) 식이 머물면 그 머문 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식에 와서 쌓이지요. 그러면 누적된 식이 늘어나지요. 이렇게 식이 머물고 증장하면(늘어나면) 거기에 명색이 참여한다 라고 하여 식과 명색의 관계를 말해주지요.
어쨌든 이렇게 딱까라는 우리 내면의 방애 갈애를 만들면 갈애 이후의 과정이 위와 같이 설명이 되는 거지요. 이때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요? ‘심(心)이라는 마음이 딱까 안에서 오염되었다’ 라고 하면 갈애라고 부른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제 이 갈애를 원인으로 하는 이런(신구의 삼업 + 위딱까, 의도-기대-지향) 행위 영역이 오염되면 이 오염된 행위를 부르는 말이 있지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집착(취取)’이라고 부릅니다. 오염된 행위(=행위의 오염 = 오염된 행위를 하는 것)를 집착이라고 부르지요.
집착이라고 하는 것이 하여간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착에는 ‘욕취, 견취, 계금취, 아어취’, 이렇게 네 가지가 정의되는데, 그 집착된 행위라는 것을 (부처님이 표현하는 방법은) 우빠다나라고 해서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취(取)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취라는 것(오염된 행위를 했다는 것)때문에 식이 머물고, 머문 식이 (칠판에서 이리로 와서 쌓여) 더해져서, (그렇게 쌓여 더해진 식이) 새로운 명색과 만나서 달라져 버리는 그 상태를 지금 우리가 설명하고 있지요.
(13분 36초 ~ 15분 4초)
자, 그런 가운데 이제는 (칠판에서) 이쪽부터 한번 볼까요? 갈애라고 하는 이것은 (일단 딱까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은 좀 덮어두고) 갈애가 되는 과정에서 딱까 앞쪽에 어떤 과정이 있나요? 딱까 앞에 수(受)라는 과정이 있지요. 하여간 낙이든 고이든 불고불락이든 어떤 느낌을 경험했다 라는 그것이 수입니다. 그 경험된 것을 가지고, 나의 내면에 있는 딱까 라는 방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 갈애가 만들어지는 거지요.
그런가 하면 이 수(受),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수는 어디에서 생기나요? 촉(觸)에서 생기지요. 그럼 촉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나는 건가요? 이 촉은 삼사화합해서 생긴다고 말하면 좀 이상합니다. ‘삼사화합이 촉이다.’라고 촉이 정의가 되는 거지요. 촉이 무엇인가요? 세 가지가 만나는 거지요. 어떤 세 가지가 만나나요? 그것이 여기서 설명이 되어야 하지요.
(15분 5초 ~ 17분 41초)
식과 명색이라고 하는 것은 누적된 삶으로의 ‘나’이지요. 식과 명색이 합한 것은 오온이니까요. 물론 우리가 (칠판에서) 이 욕탐이 와서 (칠판에서) 이 오온에 작용을 하면 이것이 또 취(取)라고 합니다. 취(取)라고 하는 것이 (칠판에서 저기) ①오염된 행위이기도 하지만, ②욕탐이 와서 (칠판에서 여기) 오온을 붙잡는 이 작용도 취입니다. 그러면 오취온이 되니까 오취온인 내가 되는 거지요. 중생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이것은, 오취온인 누적된 삶으로의 내가 어쨌든 산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되는 거지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식과 명색에서 이 식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그냥 식이 아니지요. 이 식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여섯 가지 식들의 조합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때는) 식이라는 것이 덩어리진 상태에서 안식 내지 의식으로 쫙 펼쳐진 거기에 명색이라는 것이 이미 여기서(식과 명색이 더하여 오온(중생이면 오취온)이 되었으므로) 참여되어 있잖아요. 나라는 존재는 마음 혼자 내가 아니고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색(色), 몸이라고 하는 데는 어떻게 작용을 하나요? ‘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이라고 하는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참여하지요. 그리고 식이 그대로 의근의 역할까지 하지요.
그래서 식과 명색이 지금 이 순간의 삶으로 펼쳐지면 어떻게 되나요? ①안식 내지 의식과 ②안근 내지 의근, 이렇게 육식과 육근이 되지요. 이 두 개를 합쳐서 처(處)라고 합니다. 여기에 ‘안∙이∙비∙설∙신∙의’ 라고 하는 ‘육내입처(六內入處)’ 개념이 생기지요.
하여간 이 육내입처라는 것은 육식과 육근이 더해진 거예요. 이것은 엉뚱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식과 명색이 합해졌을 때, 거기의 식이 펼쳐진 것이 육식이고 거기의 색이 펼쳐진 것이 육근이에요. 물론 여기서 의근은 (색이 펼쳐진 것이 아니고) 식의 영역입니다.
(17분 42초 ~ 22분 1초)
그러면 이 육내입처는 어떤 일을 하나요?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을 하지요. 대상에는 무엇이 있나요?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것이 있지요. 각각에 특정한 대상들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육내입처라고 부르지요. 그러면 내입처가 외입처를 감각한다는 것을 위자나띠라고 하고, 이 과정을 일차인식이라고 우리가 부르지요. 이때 내입처가 외입처를 일대일의 관계로 인식하지는 않지요. 이 감각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있어요. 욕탐입니다. 욕탐이라는 것이 한 순간 이전의 내면의 상황을 싣고 오면서 우선은 ①오온을 오취온으로 만들어요. 그러면서 욕탐은 또한 ②일차인식에 간섭을 하지요. 우리는 이 욕탐을 무명의 요소라고 부르지요.
그러면 이렇게 내입처가 욕탐의 간섭 가운데 외입처를 인식했다(분별해 알았다)고 하면, 여기서 식(識)이 생기지요. 이때 이 식은 내입처에 들어있는 (칠판에서) 이 식과는 다르지요. (칠판에서 내입처의 식) 이것은 어쨌든 누적된 것이에요. 삶의 과정에 누적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새로 생겨난 이 식은 누적된 그것(내입처의 식)이 몸과 함께 해서 지금 감각되는 대상을 보고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새끼쳐진 식이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이것이 안식에서부터 의식까지 또한 육식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면 내입처와 외입처와 새끼쳐진 육식의 세 개가 됩니다.) 그리고는 (칠판에서 이것) ‘내입처 + 외입처 + 식(육식), 이 세 가지가 함께 했다.’ 라는 이 상태를 삼사화합촉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이때 이 과정, (칠판에서) 식과 명색이 함께 해서 내가 되는 과정에서, 지금 이 순간의 삶의 과정을 위해서 (식과 명색이) 펼쳐져가지고 대상을 감각하는 이 영역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이 영역을 부르는 말이 있지요. 이것을 육입(六入)이라고 하지요.
물론 경전에서는 육입에 대해서 구체적인 것으로는 육입은 육내입처라고 정의가 되어요. 그래서 육입은 ‘안이비설신의’ 가 있다고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안이비설신의가 있다는 이 말은 무엇인가요?
(안이비설신의가 있을 때) 이것이 대상 없이 나만 있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 내가 내입처로서 감각의 주관으로 지금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기본적으로 대상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이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인식한다는 이 작용은 식이 지금 보는 너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삼사화합이라고 하잖아요.
육내입처가 있다고 하는 것은 하여간 외입처와 함께 있고,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식이 새끼쳐졌다는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내입처 + 외입처 + 새끼쳐진 식). 그런데 이 전체를 설명하기가 뭐 하니까 그냥 (육입을) 육내입처가 있다고 정의를 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내입처가 있다는 것은 어쨌든 감각과정이 진행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눈을 떼어내서 눈이라고 하는 안처(眼處)라고 별개로 떼어내서 육내입처(處)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 개념을 우리가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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