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사념처에서 두 번째로 알아야 하는 것 1

풀빛 너머 2017. 3. 12. 17:01



▣ (S47-26~30)[사념처의 특별한 앎 2가지 ㅡ 수행의 중심개념과 사띠의 완성](부산 수행 170307)

   [동영상] https://youtu.be/6DImOTA_Hv8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2분 50초 ~ 19분 22초)

2. 사념처에 대해서 두 번째로 알아야 하는 것


2-1. 자, 그런가 하면 ‘왜 유학이고 왜 무학입니까?’ 에 대해 아누룻다 존자는 사념처를 불완전하게 닦아서 유학이고 사념처를 완전하게 닦아서 무학, 아라한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사념처를 보고 있습니다. 사념처에 대해 두 번째로 알아야 하는 것은 딱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 방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요즘 하고 있습니다. ‘딱까’라고 하는 방이 있습니다. 이 딱까라는 방이 어떤 방인가요? 대충 (칠판에) 그려볼게요. 2차 인식이 있지요. 1차인식에서 새끼쳐진 식(識)이, 함께 생기는 수(受)를 상(想)의 간섭 가운데 분별해서 알면, 여기서 무명(無名)과 그 위에 탐(貪) 또는 진(瞋)이 생겨납니다. 이때 상이라는 것이 사실은 중생에게는 병들어있고 치유될 수 있는 것이지요. (상이 완전히 치유되면 아라한이라고 하고, 상이 병들어 있으면 번뇌라고 합니다.)


그래서 식이, 1차인식에서 생겨난 식이 수를 상의 간섭 하에 분별하는데(2차인식), 중생에게는 상이 병들어있기 때문에 상이 번뇌라는 형태로 간섭해서 (2차인식의 결과) ‘무명과 탐, 진’이 됩니다. 그리고 식의 몸통이 외입처에 대한 앎이고, 2차인식을 통해서 수에 대한 왜곡된 앎(탐)을 만들었으므로, 1차인식과 2차인식을 포괄한 인식의 결과라고 하면, 그것을 앎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이 심(心, 찟따)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찟따는, (기본적으로 식(識)이라는 마음은 인식하는 마음이고, 심(心)은 행위하는 마음입니다.) 이 심의 행위는 내적 행위와 외적 행위의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심이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고 하는 내적인 행위를 하면 어떻게 되나요? 여기서 난디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보통 즐김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탐과 난디가 함께 한 상태를 갈애라고 부릅니다. 하여간 심이 한번 더 부풀려서 갈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갈애 상태에서 ‘위딱까’로, 그 다음에 ‘의도-기대-지향’을 거쳐 ‘사유’로 나가는, 그런 내용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2-2. 이런 가운데 우리가 사념처와 관련하여 알아야 되는 두 번째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딱까라고 하는 이것은 우리 내면의 방(마음)입니다. 딱까라는 이 방이 두 개로 구분이 된다고 했습니다. (칠판에서) 여기까지 과정은 심이라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과정입니다. 심이라는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경전은 ‘심행(心行)은 상(想)과 수(受)다.’고 정의해줍니다. 심이라고 하는 것은 : 식이라고 하는 1차인식에서 생겨난 새끼쳐진 식, 이것이 상과 수의 과정, 즉 2차인식을 거쳐 탐(貪)을 만들어 자기를 부풀린 상태입니다. (심은 - 식이 1차인식과 2차인식을 거쳐 탐을 만들어 자기를 부풀린 상태)


그러니까 식이 어떻게 생겨납니까? 는 여기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식은 1차인식에서 생겨난 그 상태를 놓고, 이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부풀려져서 심이 될까요? 를 보고 있습니다. 심이라는 마음은 상과 수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칠판에서) 노란 선 그은 여기까지는 행위하는 마음인 심이 생겨나는 과정입니다.


그런가 하면 (칠판에서) 여기부터 이 이후는 이 심이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는 내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칠판에서) 여기부터는 심의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칠판에서) 여기는심이 형성된 작용이고 여기는 심이 행위하는 영역입니다.



(19분 23초 ~ 22분 59초)

2-3. 사띠는 우리가 어떻게 알고 있나요? 지난 번에 우리가 단속을 보았습니다. 사띠는 기본적으로 내 마음의 현재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띠는 ‘나의 마음이 지금 발견되고 있다, 잘하고 있다, 계속 잘 해, 더 잘해.’, 이렇게 바름을 유지 향상시켜주는 것입니다. 또 내 마음을 발견하고 보니 잘못하고 있으면 ‘안 돼, 바름으로 돌아가야 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띠는 심의 상태든 식의 상태든 의의 상태든 ‘마음의 상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념처가 정의하는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와 연결됩니다). (사띠해서 마음의 현재를 발견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삼빠자나’이고, 그름은 버리고 옳음으로 가서 유지 향상하는 노력이 ‘아따삐’이고, 그렇게 사띠하는 사람을 ‘사띠마’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념처 수행의 본질입니다.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


어쨌든 그렇게 사띠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띠는 마음의 현재를 발견해서 그 상태가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를 판단해서 옳은 상태를 만들어서 향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무엇이라고 하면 ‘단속(상와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우리가 단속에는 다섯 자리가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디. 계의 영역의 단속이 첫 번째로 나오고, 신구의의 단속이 두 번째로 나오고, 1차인식의 자리에서 감각기관의 단속이 세 번째로 나오고, 촉해서 수가 생겨나는 육촉처의 단속이 네 번째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의 단속이 바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는 것은 단속되었다고 표현하고,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어서 갈애가 되는 것은 단속하지 못한 것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띠라는 단속하는 기능, 단속을 자기 본질로 하는 사띠, 이 사띠가 어디까지 그 역할을 하는가? 라고 할 때, 바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는 것을, 달리 말하면 ‘염오’라고 하는데, 염오하는 데까지도 사띠의 활동입니다. 염오해서, (찟따가 생겨나는 과정은 제외하고), 생겨난 찟따가 행위하는 영역은 완전히 제어되는, 거기까지를 사띠의 영역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지요.


‘사념처가 어디까지 가는가?’ 라고 하면, 사념처가 사띠를 힘 있게 하는 것이니까, 사띠가 가장 힘이 있어지면 그 힘이 있어진 상태가 바로 염오해서 행위의 영역은 완전하게 제어되는데, 거기까지 사념처가 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