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사념처에서 두 번째로 알아야 하는 것 2

풀빛 너머 2017. 3. 13. 16:41

▣ (S47-26~30)[사념처의 특별한 앎 2가지 ㅡ 수행의 중심개념과 사띠의 완성](부산 수행 170307)

   [동영상] https://youtu.be/6DImOTA_Hv8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3분 ~ 26분 31초)

2-4. 사띠토대 : 사띠의 완성, 사념처가 완전히 닦아진 것

그러면 마지막 남아있는 문제는 찟따라는 이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의 문제만 해소하면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존재에 내재한 문제를 해소하는, 그것만 남겨놓은 상태가 됩니다. 이 상태를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경전은 여기에다 ‘사띠아야따나’ 라는 말을 쓴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사띠토대’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띠가 위에서 말한 이런 행위를 단속하는 그 역할에 끝까지 가면, 완성하면, 딱까의 내면에 있는 이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는 내적인 행위까지도 제어됩니다. 즉 염오되어 더 이상 행위와 관련된 문제는 하나도 없어요. 완전히 제어되었어요, 단속되었어요. 여기까지가 사띠의 영역입니다.


그럼 ‘사띠토대’라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사실 여기까지 오면 남은 것은 찟따가 형성되는 이 과정입니다. 마음이 생겨날 때 수반되는 문제 상황, 바로 상이 병들었기 때문에 병든 상의 문제로 생겨나는 무명위의 탐∙진, 이 부분 문제만 해소하면 됩니다. 이 부분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바로 사띠가 완성되어, 사념처가 완전히 닦아져서 사띠토대라고 하는 행위가 완전히 단속된 그 자리까지를 가야 합니다. 이런 토대가 마련되어야 이제 그 안에 있는 찟따가 형성되는 과정의 문제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습니다. 사념처를 이야기할 때는 우리가 하여간 수행의 중심 개념으로 ‘사념처와 장애와 칠각지의 이 상관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제가 볼 때 중요한 것이, 이 ‘사띠가 어디까지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일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가 막힌 겁니다. 바로 사띠토대라고 불리는 여기까지 오는 것, 이것을 달리 말하면 ‘사띠의 완성’이고, 이 말은 ‘사념처의 완전한 닦음’입니다. 사념처가 완전히 닦아진 것이 사띠가 완성된 것이고, 이것이 사띠토대입니다. 이 개념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띠토대가 갖추어졌다는 이 상태에서는 이제 마음(심)이 형성되는 그 과정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아누룻다 존자는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사띠토대가 완성되었다고 하면 이제 나머지는 식은 죽먹기이겠지요.

사띠토대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면 못하겠지요.



(26분 32초 ~ 31분 21초)

2-5. 사실 이런 부분이 있잖아요. 딱가라는 방이 있어요. 이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지요.

번뇌가 작용해서 무명과 탐∙진이 생겨나는 것은,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어서 난디가 되는 것은, 난디에서 갈애가 되는 것은 모두 닦까라는 방안의 일입니다. 그런데 ◌◌◌◌ 법우님. 딱까라는 방안의 문제를 히결하려고 하여 이제 여기를 좀 청소를 해야 하겠어요. 이 방안을 청소하자고 하면서 방 밖에서 열심히 걸레질을 하면 될까요? 안 되겠지요. 방안을 청소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딱까안에 문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딱까 안에 문 열고 들어가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딱까 안에 문 열고 들어가는 이것이 바로 여실지견이라고 불리는 거지요.


여실지견이 무엇인가? 하니, 존재의 실상(무상, 고, 무아)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고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이렇게 여실지견한 상태를 누구라고 하나요? 이것을, 여기(여실지견한 자리)를 예류자라고 하지요. 그래서 딱까라고 하는 내면의 방 청소를 하려면 어쨌든 방문을 열어 제쳐야 합니다. 여실지견 해야 합니다. 여실지견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염오해 가지고 사띠토대를 만들고, 일단 빗자루를 가지고 큰 것부터 쓸어버려야 다음에 닦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것부터 청소하여 (염오하여 마음(심)에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게) 사띠토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이 과정에 사마타-위빳사나 이지요. 사마타-위빳사나를 통해서 내면의 청소를 마칩니다.


그래서 이렇게 딱까 내면을 청소하는 출발자리는 여실지견, 예류자입니다. 예류자만 되면 어쨌든 일곱 번 생 안으로 방 청소를 끝냅니다. 하여간 딱까라는 방 내면을 청소하는데 길어야 일곱 생이면 됩니다. 그러니까 예설지견, 예류자가 되는 이 과정에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여실지견하려면 법의 위빳사나가 필요합니다. 법의 위빳사나는 법이 일어나고 유지되고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경전이 말하는 상(想)이거나 수(受)이거나 위딱까거나 하는 이런 법들이 생겨나고 유지되고 없어지는 것이 내면에서 보여요. 이런 개념이지요. 그것이 법의 위빳사나입니다.


그러면 법의 위빳사나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법이 드러나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법이 드러난다는 표현을 합니다. 법이 드러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바른 삼매가 필요합니다. 이 바른 삼매는 어떻게 들어가나요? 사념처에 의해서 들어가지요. 사념처로 시작해서 바른 삼매에 들면 법이 드러나고, 법의 위빳사나를 통해서 무상∙고∙무아라는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여실지견, 예류자가 되면 그것이 딱까에 문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염오하고 사마타-위빳사나로 나아갑니다. 염오하는 그 자리, 염오해서 하여간 (방안에도 큰 것들이 있는데) 빗자루로 큰 것들을 쓸어내는, 이것까지 하면 행위영역이 완전히 단속되었다고 하고, 사띠토대가 갖추어졌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띠토대가 갖추어진 그 위에 사마타-위빳사나로 끝냅니다..


하여간 사념처와 관련하여 알아야 하는 두 번째는 이런 개념입니다. 그것은 ‘찟따의 행위 영역이 완전히 제어된 그 상태를 사띠토대라고 부른다. 이것이 사념처의 완전한 닦음을 통해서 사띠가 완성된 상태다.’입니다.



(31분 22초 ~ 34분 8초)

3. 자, 이것을 놓고 보면 경전 두 개가 아누룻다 존자에게 왜 유학입니까? 라고 하니까 무엇이라고 대답하나요? 사념처를 불완전하게 닦았다고 대답합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사념처가 완전히 닦아져서 사띠토대가 완성되어야 그 토대위에서 사마타-위빳사나로 찟따의 형성 과정을 제어하고 아라한이 됩니다. 딱까라는 방의 청소를 끝냅니다. 그런데 이것(사띠토대)이 불완전하면 딱까의 방청소를 다 못 간 거예요.


어쨌든 그래도 그 앞(아라한 앞 단계)에 유학이라는 개념이 무엇인가요? 어쨌든 문은 열고 들어왔어요, 이것이지요, 예류자이니까요. 여실지견해서 문을 열고 들어는 왔어요. 그것은 그 앞에 사념처를 통해서 바른 삼매에 들었고 바른 삼매에서 법의 드러남에 의해서 법의 위빠사나로 여실지견까지 왔다는 이 개념은 전제가 되어있는 거지요. 그래서 부분적으로 경이 말하는 의미가 드러나지요.


그리고 완전하게 닦았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사념처를 완전히 닦았다는 것입니다. 사념처가 완전히 닦아지려면 어떻게 해요?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여실지견해서 문 열고 들어와서 딱까라는 방 내면에서 행위의 마지막 부분, 내적인 행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음으로써 난디를 만드는, 갈애가 만들어지는, 이것까지를 해결하는 것이지요. 그럴게 완전하게 닦아서 사띠가 완성되면 사띠토대라고 하고, 그 위에서 사마타-위빳사나로 깨달음을 얻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왜 무학입니까?’ 하니까 ‘사념처를 완전하게 닦았기 때문에 무학입니다.’고 하는 것이지요.


제가 볼 때는 이 경전 두 개가 유학과 무학을 정의해주는데, 이런 개념, 특히 두 번째 딱까와 관련한, 사띠토대와 관련한 이런 앎이 있으면 이 경전의 의미가 설명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누룻다 상윳따를 통해서 아누룻다 존자가 수도 없이 사념처로 깨달았다고 말하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지요. ◌ 법우님, 몇 주 전에 이 애기를 했지요. 그것을 이렇게 보니까 좀 더 명확해졌지요. ‘수행의 중심 개념과 사띠토대’, 이 두 가지를 사념처에서는 잊지 않도록 합시다.


(저의 녹취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