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47-31~35)[사념처의 개념 & 수행의 마지막 과정](부산 수행 170314)
[동영상] ☞ https://youtu.be/8B2b5lU-278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6분 59초 ~ 21분 53초)
윤회의 진실 교재를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224쪽을 보겠습니다. “사념처의 개념 - 보는 자와 염처의 관계” 라고 단순한 그림을 하나 그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단순하지만 제가 몇 번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정말 사념처 수행을 설명하는 가장 어렵고도 잘 그려진 그림이라고, 아마도 사념처 수행을 이제 좀 알았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준 그림이라고 제가 몇 번 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보면, 하여간 신수심법 사념처를 쉽게 보지 않는 거예요. 첫째로 ‘보는 자’라고 하여 의(意, 마노)를 제시하면서 일차인식이 나옵니다. 일차인식은 ‘안이비설신의’ 육내입처가 ‘색성향미촉법’ 육외입처를 무명의 요소인 욕탐의 간섭 가운데 인식하는 거잖아요. 그럴 때에 어쨌든 심의식(心意識)의 마음의 입장에서는 ‘몸과 함께 한 상태의 의(마노)’가 일차인식의 주관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보는 자는 의(意, 마노)입니다. 그래서 일차인식을 해요.
그런데 일차인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우리가 호흡수행을 한다고 하면, 몸에 닿는 것으로의 공기 알갱이가 주는 느낌, 이것이지요. 그런데 공기 알갱이가 ‘그냥 여기 콧구멍 근처 어디에 닿았어, 그래서 느낌이 있어.’ 라는 것이 인식의 완성은 아니지요.
일차인식이라는 개념의 첫 번째는 작의(作意) 하는 것이에요. 공기 알갱이가 닿아서 주는 그 느낌에 내 마음을 딱 주목하는 것이 작의이지요. 그 주목하면 어떻게 되요? 내가 주목한 이것이 ‘아, 이것이 공기 알갱이가 주는 느낌이구나, 이 느낌이 이렇구나. 차가운 느낌이 있다, 따뜻한 느낌이 있다.’고 알 수도 있고, ‘아, 이 호흡이 좀 긴 호흡이다, 이 호흡은 좀 짧은 호흡이다.’ 라고 알 수도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목해서(작의해서) 생겨나는 외입처에 대한 앎이 있습니다. 그 외입처에 대한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을 식(識)이라고, 새끼쳐진 식이라고 말합니다.
신념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다음 주가 되든 그 다음 주가 되든 대념처에 들어가겠지만, 신념처를 말하는, 호흡수행을 말하는 첫 마디가 무엇인가요? ‘길게 들어올 때는 길게 들어온다고 알고 길게 나갈 때는 길게 나간다고 안다. 짧게 들어오면 짧게 들어온다고 알고 짧게 나갈 때는 짧게 나간다고 안다.’, 이렇게 하는 거지요. 이것이 무엇d니가 하면 호흡이라는 여기에다가 내가 작의, 주목하는 거예요.
주목했더니 ‘아, 내가 지금 보는(주목한) 이 공기 알갱이가 닿으면서 주는 느낌이 길구나, 짧구나.’, 이렇게 분별해 아는 거잖아요. 인식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닿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분별해서 아는데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호흡이 길다, 호흡이 짧다.’, 이렇게 인식된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이 자리가 무엇인가요? 그것이 신념처입니다.
자, 지금 이 경에서 “신에서 신을 이어보는 것이다. 이것이 ...” 라고 했을 때 ‘이것이’라는 것이 무엇일가요? 지금 설명 드리는 이 그림에서 말하는 이런 정도로 이해를 하는 것, 그런 가운데 이어지는 좀 더 깊은 수행이 진행되는, 이것이 제가 볼 때는 ‘신에서 신을 이어보는 것이다, 신념처이다.’ 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개념인 것 같아요.
(21분 54초 ~ 30분 40초)
그런가 하면 일차인식을 하면 어떻게 되나요? 식이 새끼쳐지는데 거기에서 삼사화합촉하여 수(受, 경험)이라는 것이 함께 생겨나지요. (조금 전에 일차인식에서 일단 생겨나는 결과가 있다면 이것을 이어보는 것이 신념처였는데), 여기서 보니까 일차인식에서 또 하나의 결과물이 있지요. 수(경험)가 생겨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주목하는 상태에서 여기서 생겨난, 그러니까 내가 주목한 이 대상(호흡)이 ‘길게 들어온다, 짧게 들어온다.’ 라고 이렇게 알 수도 있지만, / 그것이 삼사화합하여 그것 때문에 내가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다. 라고 이렇게 일차인식의 두 번째 결과를 내가 알기도 하는 거잖아요. 수념처라는 것은 그렇게 되지요. 그래서 경에서 두 번째로 말하는 것이 “수에서 수를 이어보는 것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가 아는 거지요.
그런가 하면 이제 그때부터는, 사실 말이 ‘신념처다, 수념처디’ 라고 하지만,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니지요. 신념처와 수념처 라는 것이 아주 많은 노력을 통해서 집중되어서 호흡을 잘 붙잡았기 때문에 우리가 호흡이 긴지 짧은지를 볼 수 있지요. 호흡을 더 잘 붙잡았기 때문에 내가 붙잡고 있는 이것에서 어떤 느낌이 경험되는지 수념처로 넘어가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상당히 깊은 수행의 경지로 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이제 삶은 점점 진행됩니다. 즉 일차인식이 식(識)과 수(受)를 만들고 나면 삶은 이차인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인식인 일차인식에서는 의(마노)가 보는 자가 되어서 주목하는 일을 통해서 식과 수를 선택적으로 볼 수가 있는데, 그 상황까지 수행이 깊어지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상황이 이제 보는 자가 깊어지는 거지요, 달라지는 것이죠.
표면에서 마노가 딱 붙잡고 있으면 이제 거기에서 외입처에 대한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식)이 새끼쳐졌다고 합니다. 이 새끼쳐진 식이 이제 내면의 상황을 보는 두 번째의 보는 자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 교재의 그림을 보면 ‘심념처’라고 하여 ‘외입처의 앎에 이어 보는 자가 식이다’ 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지요.
하여간 식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앎이 아니고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마음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식이 이제 두 번째 나의 내면의 상황을 보는 자로서 자기 활동, 보든 못보든 활동을 하는 거지요, (수행이 깊지 못해서 우리가 못 보지만), 그러나 수행이 깊어진다는 조건으로 이제 ‘식(識)이 수(受)를 상(想)의 간섭 가운데 분별하여 아는’ 이차인식하는 상황이 알려지는 거지요.
그래서 이렇게 식이 보는 자가 되어서 이차인식을 하면 이차인식이 무엇을 만드나요? 탐(貪)을 만들지요. 그런데 탐이 만들어져서 생겨나는 것은 무엇이지요? 마음 심(心)자로 쓰는 심, 찟따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심행(心行)이, ‘찟따가 형성되는 작용이 탐과 수다’ 라고 하여, 이차인식을 통해서 탐을 만들어가지고 그 탐을 몸통의 절반으로 하는 심(心)이 생겨나지요.
심념처가 대념처 수행에서는 어떻게 나오나요? 심념처가 이렇게 나오지요. 이 마음(심心, 찟따)이라는 것이 ‘탐과 함께 하는 상태일까? 탐과 함께 하지 않는 상태일까?, 진과 함께 하는 상태일까? 진과 함께 하지 않을까? 치와 함께 하는 상태일까? 치와 함께 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나가서 16가지로 구분합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즉 심념처는 ‘심(찟따)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하면서 마음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심념처가 아닙니다.
대념처경에서 말해주는 심념처의 정의는 ‘심(찟따)이 생겨나는데 어떤 것을 만들어가지고 생겨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인 우리는 보통) 탐을 만들어가지고 탐과 함께 하는 상태로 부풀려진 심(찟따)의 상태가 됩니다. 즉 심이 탐으로 부풀려진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심념처는, 이차인식에서 식이라고 하는 이 ‘새끼쳐진 마음(識)이, 이차인식을 통해서 탐이 만들어져서 부풀려져서 찟따(심心)가 되었다. 즉 심(찟따)이라는 이 마음이 어떤 상태로 만들어졌는가?’ 를 보는 것이 심념처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라는 식으로) 심념처에 대해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찟따의 형성 과정)을 보려면 우리는 어쨌든 표면적인 삶을 가지고는 못 보지요. 그러니까 심념처, 수념처라는 두 단계를 통해서 확고하게 대상을 붙잡아냈을 때, 이것을 경전은 니밋따를 취한다고 말하는데, 확고하게 대상을 붙잡아냈을 때 비로소 보는 주관이 내면으로 들어가서 식이 주관이 되어서 이차인식에서 생겨나는 찟따의 상태를 보는 것이 심념처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놓고 경전은 이것이 ‘심에서 심을 이어보는 것이다.’고 설명해주는 것이지요.
자, 그럼 이렇게 ‘찟따가 찟따를 이어본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삼마에 들어가지고 법들을 본다는 것입니다. 바른 삼매에 들었으니까 그동안 후다닥 지나가던 삶의 과정에서 보여지지 않던 내면의 법들이 이렇게 삼매에 들었다라는 이것을 조건으로 드러나는 거지요. 보이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이제 찟따라고 하는 이 마음이 어떤 일을 합니까? 삼매에 들었기 때문에 드러나 보여지는 법들을 이어본다고 합니다. 이 법들의 일어남∙사라짐을 이어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그 법들이 ‘무상하다’라는 것을 꿰뚫게 됩니다. 이렇게 나가는 것이 무엇인가요? 드러나는 법을 이어본다는 것으로의 법념처, 이렇게 되지요.
이 설명이 어려운 설명이기는 해요. 그러나 사념처수행이, 특히 대념처경이 참 오랜 세월 해석되고 있지만, 어쩌면 그 대념처 경이 온전하게 해석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신수심법 사념처라는 것이 이렇게 삶의 과정, 수행의 과정이 깊어지면서 순차적으로 드러나는 심화된 과정이라는 것을 메커니즘적으로 설명해내지 못해서 그랬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어쨌든 뒤에 우리가 좀 더 자세히 보겠지만, 저는 이 그림. 그림으로는 단순하지만 정말 깊고 의미 있다고 봅니다. 사념처를 대념처경 해석에 근거를 마련해주는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이 동영상 법문에 대한 저의 녹취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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