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14-3. 신념처후렴구 뒷부분 중 일부

풀빛 너머 2017. 7. 4. 05:15


▣ 대념처경 - 신념처5[후렴2)앎만이 있을 때까지-부대-집착하지 않음](부산 수행 170627)
   [동영상] https://youtu.be/3v6w97qSc7E





(50분 9초 ~ 1시간 1분 4초)

3. 찟따(心)의 몸통 : 앎(知)

그러면 법우님, 앎과 사띠만이 있을 때까지라고 했는데, 사띠는 (위에서) 그렇게 역할로 보았다면, (이제) 앎만이 있을 때까지라고 (하는 의미만) 보면 되는데, 앎만이 있들 때까지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이 이야기 하나를 하려고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보았지요. 이것이 지금 무엇인가 하면, 이 찟따라고 하는, ‘마음 심(心)’ 자를 쓰는 이 마음이 무엇일까? 라는 부분을 접근하면서., 일단 (칠판에서) 이 선까지 해서 생겨나는 과정이 있고, 이후는 생겨난 그것이 자기 활동을 하는 과정이라고 보았지요.


그랬을 때 이 심(心)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이 심의 몸통이 무엇인가요? 원래 이 심(心)은 몸통이 있고 자기 활동성이 있습니다. 그럴 때 지금 경전은 말하기를, 앎만이 있을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앎이 무엇인가요? 마음의 몸통입니다. (그래서 앎만이 있을 때까지는) 몸통만이 있을 때까지라고 말하는 거지요. 마음 심이 자기의 활동성을 다 배제해두고 앎이라고 하는 자기 몸통만으로 있을 때(까지를 말해주는 거지요). 여기서 몸통은 어쨌든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니까, (찟따가) 어떻게 생겨난 놈이냐, 생겨난 그 상태가 어떠하냐? 라는 것은 접어두고, 즉 일단 (찟따의) 활동성은 다 배제시키고, 앎만이라고 하는 몸통만이 남아있는 그 상태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활동성이 배제된 몸통만이 있다는 이 상태를 어떻게 이해할까요? 그동안 우리가 멸(滅)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요. 니로다. 이 니로다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하나요? 다 부수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지요. 메커니즘적으로 아주 중요한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차인식에 부대하는 상(想)은, 우리가 욕계 중생이든 색계중생이든 무색계 중생이든 중생으로 있는 한 상은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습니다.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병들어 있다, 달리 만하면 (우리의 상은) 번뇌 상태로 있다는 것입니다.


멸(滅)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번뇌를 부순다는 것은 ‘상(想)의 병듦을 치유함으로써’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고의 힐링은 상의 병듦을 치유하는 겁니다, 번뇌를 부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거지요. 그래서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나는 상태(가 멸입니다).


그럼 탐은 무탐으로 진행되고 진은 무진으로 진행되겠지요. 무명과 번뇌를 합쳐 치라고 하고 번뇌없음과 명을 합쳐서 무치라고 하니까, ‘탐진치의 병든 삶’과 ‘무탐무진무치의 치유된 삶’을 우리가 충분히 공부해서 알고 있지요.


이렇게 멸이라고 하는 개념은 불교안에서 중요한 말입니다. 멸이라고 하여 ‘없다, 소멸했다’는 상태는, 마음이 생겨나기는 했는데 아무런 삶이 없다는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자, 이제 방금 이 과정에서 ‘탐진치의 상태’와 이것이 ‘무탐무진무치로 변하는 상태’를 보았잖아요. 이때 탐진치와 함께 하는 삶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유위(有爲)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무탐무진무치, 이렇게 번뇌가 부수어져서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나는 상태를 무위(無爲)라고 불러요. 그래서 우리가 자주 말하는 거지요. 무위는 삶의 완성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무위라고 번역했다고 해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로서의 삶의 완성하고 같이 보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삶의 완성인 무위는 탐진치를 다 부수고 무탐무진무치의 삶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런 개념이 적용되어서 보면, 찟따가 자기 활동성이 해제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는 것이 없어지면, 난디도 없어지고, 그럼 갈애도 없어지고, 그럼 이 이후의 삶은 오염되지 않는 청정한 삶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면의 어떤) 과정이 없을까요?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다는 것을 염오라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난디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고 이후에 아라한의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이 이어지지요. 그러니까 무위의 삶이 실현되었다고 해서 행위하는 삶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 ‘니로다, 멸, 소멸하다’는 의미를, 불교 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번뇌의 영향 때문에 탐진치와 함께 하는 유위적인 중생의 삶을 사는 것은, 이 찟따의 행위 과정이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는 과정이) 있다 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즉 오염된 상황으로의 행위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번뇌를 부수고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난 무탐무진무치의 무위의 삶이 이루어지면 아라한의 삶이고 아라한도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라한의) 삶은 소멸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개념을 우리가 이해하면 이제 경전이 말하는 이 이야기, ‘앎만이 있고 사띠만이 있을 때까지’라는 이 말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사띠라는 이것은 사띠가 잘 단련되어서 강력하게 역할을 함으로써 앎만이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때까지 사띠가 함께 하는 거지요.


그러면 이 앎이라는 것은 찟따의 몸통인 지(知)입니다. (앎(知)은) 찟따의 활동성은 완전히 배제되고 몸통이 있는 상태인데, 배제되었다는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니로다, 번뇌가 부수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 이래가지고 지금 경전이 말하는 ‘몸이다 라고 사띠가 현재한다. 오직 앎만이 있고 사띠만이 있을 때까지’ 라는 이 말은, 사띠와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어디까지 가는 것인가? 인데, 아주 중요한 겁니다. 수행을 보는데서 기본적으로 사념처 수행은 무엇하는 건가요? 사띠를 단련하는 수행이잖아요. 사띠를 단련하는 이 수행이 어디까지를 가는 것인가 하면 찟따라는 마음의 활동의 모든 영역, 즉 딱까 밖의 영역 모두와 딱까 안의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어서 난디를 만드는 영역입니다). 달리 말하면 찟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외한 찟따의 모든 활동의 영역이 사념처 수행에 의해서 단속됩니다.


사념처 수행의 의미가, 찟따가 형성되는 과정을 제외한 삶의 과정 전체에 대해서 제어하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단속이라는 말을 쓰지요. 그래서 다섯 군데 단속이 있다고 공부했지요. 그래서 쨋따가 행위하는 활동성의 영역에 대해서는 모든 문제가 해소되고, 오직 찟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 앎이라는 것 안에

어떤 문제가 있을까 하는 이 문제 하나만 두고, 여기까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인데, 여기까지가 사띠가 완성되고 사념처가 완성된 상태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사념처에 잘 확립된 마음이라고 말하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