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9분 50초 ~ 1시간 18분 30초)
5. 아빈냐 → 사띠토대 → 빠린냐
그 다음에 중요한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이제 사띠가 잘 단련되어 오직 앎만이 있는 상태까지 왔어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요? 찟따가 생겨나는 과정의 문제를 제외한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이지요. 이런 상태는 사념처 수행을 하면 사띠가 단련되고 같이 힘있어 지는 것이 지혜를 무력화시키는 다섯 가지 장애를 사띠로 제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어떤 효과가 있나요? 사띠가 단련되고 삼매가 이루어지고, 거기에 중요한 것이 지혜를 무력화하는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지혜가 힘있어 진 것집니다.
그러니까 사띠가 단련되어 오직 앎만이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이때는 지혜가 아주 높은 수준까지 온 거예요. 그럼 지혜가 향상되고 있다고 하면 지혜라도 똑 같은 지혜라고 부르기가 곤란하지요. 어느 만큼 온 지혜인가, 이렇게 지혜를 구분해 주어야 하는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경전은 바로 이 염오된, 활동성의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이때의 지혜를 부르는 단어가 ‘아빈냐’라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아빈냐를 실다운 지혜로 번역했다가 얼마 전에는 ‘수승한 지혜’로 바꾸었지요. 수승한 지혜는 어쨌든 찟따가 형성되는 과정의 문제 말고 생겨난 찟따가 살아가는 동안에 생겨나는 모든 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었다이며, 그 상태의 지혜를 아빈냐, 즉 수승한 지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면 아빈냐라고 하는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하나요? 사마타로 이탐하고 위빳사나로 소멸하잖아요. 이렇게 하여 형성과정의 문제까지 완전히 해소하면 무위의 삶이 실현되었다∙깨달았다∙아라한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때는 아빈냐보다도 지혜의 상태가 좀 더 높아졌겠지요. 내면의 문제까지 해소한 것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무위가 된, 완전히 해결된 상태의 지혜를 ‘빠린냐’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완전한 지혜’라고 번역했지요. 그래서 아빈냐와 빠린냐, 이 두 가지의 지혜 상태를 구분해서 보아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 이렇게 수승한 지혜의 상태 - 아빈냐를 보았고, 그 다음에 이 상태를 또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삼매토대입니다.) 삼매를 어떻게 말하나요? 불교 수행에서 삼매는 (최종) 목표가 아니지요. 삼매는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토대라고 말을 하지요. 삼매가 토대가 되는 이유는 어쨌든 딱까라고 하는 내면의 방 안으로 들어와서 이 내면의 문제를 해소하려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매라고 하는 토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삼매라는 토대에서 와 가지고, 이제 완전히 아빈냐로 활동성의 문제를 다 해결했어요. 즉 찟따의 행위 문제는 모두 해소되었어요. 그러면 그런 아빈냐라고 하는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넘어서, 이제 남아있는 것은 오직 찟따가 형성되는 과정의 문제뿐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또 하나의 토대라고 씁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나는 말이 ‘사띠토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띠토대가 되어 있는 이 상태를 경전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사띠토대가 있으면 수행자가 ‘내가 신족통을 성취해야겠다라고 원하면 성취할 수 있다, 천이통을 성취해야겠다라고 원하면 성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띠토대위에서 비로소 육신통을 성취할 수 있다고 나와요. 육신통의 완성이 누진통이라고 하여 아라한이 되는 거잖아요. 누진통이 바로 번뇌를 부수어서 무명이 부서지고 명이 일어나서 깨달음으로 가는 거지요.
사띠토대라고 하는, 활동성이 완전히 제어된, 달리 말하면 사념처 수행이 완성된, 사띠가 완성된, 이런 상태를 토대로 그 위에서 이탐과 소멸의 과정, 즉 사마타-위빳사나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 자리가 사띠토대라고 불립니다.
시작부터 마음 심(心)자 하나를 그려놓고 선(線) 하나를 그어놓고 이야기했지요. 이 선 하나의 의미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떨침이다, 활동성의 모든 문제를 해소한 자리다, 그것은 염오한 것이다, 단속이 끝난 것이다. 그 자리가 사념처의 완성이고 사띠의 완성이다, 사념처가 잘 확립된 마음이다.’라고 합니다,
거기에 이어서 지혜의 측면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빈냐 - 수승한 지혜다, 끝까지 가면 완전한 지혜 - 빠린냐’라고 합니다. 그리고 빠린냐로 가기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에 이 자리를 사띠토대라고 합니다. 사띠토대는 사띠가 완성되어 가지고 버텨주는 토대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이 상태를, 오늘 수업은 이것 때문에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앎만이 있고 사띠가 있을때까지’라고 말하는, 사띠라고 하는 이 기능이 완성되어가지고 하여간 활동 영역의 모든 문제는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생겨나는 과정의 문제, 찟따의 몸통이 생겨나는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그 상태를 ‘앎만이 있고 사띠가 있을 때까지’라고 합니다. 활동의 문제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때까지를 어떻게 가는가요? ‘호흡이다 라고 사띠가 현재한다, 오직 사띠하면서 들이쉬고 오직 사띠하면서 내쉰다’라는 일을 통해서 거기까지 간다고, 지금 일곱 번째 후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그때까지라고 하여, 마지막 사마타-위빳사나에는 호흡을 놓고 하나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지요. 사념처의 완성이라고 말해주느라고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보는 거지요. 그래서 ‘혹은’ 이라고 제시된 일곱 번째 이야기를 끝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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