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입(六入)에서 눈(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이 글은 육입에서 말하는 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스스로 생각하며 연습해보는 글입니다. 육처 상윳따(S35)의 내용을 인용하고 어느 불교 사이트의 故 ◌◌ 법우님의 댓글들을 사유하면서 참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려다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갔습니다. 강 아래에 사는 큰 악어가 그 사람들을 붙잡아 놓고서 잡아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화살이 날아와 악어의 한쪽 눈을 맞혀 악어는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다가 혹시 눈에 대해 알면 화살에 맞은 고통이 잦아들까 하여 악어는 잡아온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눈(眼)’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놓아주겠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손으로 눈을 가리키며 이것이 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악어가 눈이 크다거나 눈이 예쁘다거나 눈이 맑다거나 눈이 휘둥그레졌다거나 눈이 아프다거나 하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이 나쁜 사람은 잘 보려고 안경을 낀다고 할 때, 안경 모양을 말하지 말고 보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끼는 안경의 특성에 대해 말해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예전에 배웠거나 사색한 것들을 떠올리며 눈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 궁리했습니다.
사람1이 말했습니다. “과학자가 로봇의 몸체(身)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로봇의 얼굴에 보는 기능을 담당하도록 사람 눈을 본떠 눈을 두 개 만들어 집어넣었습니다. 그 눈 속에는 ‘색(色)에 민감한 어떤 물질’이 들어있어서 앞에 빛이나 형상 등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런 비유를 생각하면서 저는 눈(眼)이란 색(色)에 민감한 물질을 가진 것으로 몸에 붙어있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사람2가 말했습니다. “눈(眼)은 물질입니다. 그런 눈은 색(色, 빛이나 형상)에 반응합니다. 그래서 눈으로 색을 보게 되면 눈의 식(眼識)이 생겨납니다.”
사람3이 말했습니다. “손으로 바위를 만지면 딱딱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합니다. 이때 손바닥은 안의 감각장소(內入處)가 됩니다. 바위에 있는 단단함과 차가움은 감촉(觸)인데 그 감촉은 밖의 감각장소(外入處)가 됩니다. 눈으로 저것을 볼 때 눈은 안의 감각장소가 되고 저것은 밖의 감각장소가 됩니다. 눈으로 저것을 볼 때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나고, 여러 가지 마음도 일어납니다. 탐욕이 함께 한 마음, 성냄이 함께 한 마음, 어리석음이 함게 한 마음 등등. 그래서 나는 눈으로 볼 때 즐거워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선법도 짓고 불선법도 짓습니다.”
갑자기 악어가 멍해졌습니다. 새로운 용어가 나오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말들도 있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의 말을 듣는 동안 화살에 맞은 눈의 고통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악어는 세 사람을 풀어주었습니다.
사람4가 말했습니다. “눈은 무상합니다. 업에 의해 태어난 것이라서 눈은 항상하지 않습니다. 항상하지 않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조건들이 결합되어 생겨났으니 눈은 무상하여 무너져서 괴로움입니다.”
사람5가 말했습니다. “눈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해 바뀌는 것이라서 무아(無我)입니다. 만약 눈이 아뜨만(我) 이라면 병이 없고, 이렇게 되었으면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은 병이 들고 노쇠해지고 이렇게 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래서 눈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악어가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저것을 본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눈을 ①나의 소유이고, ②나 자신과 같은, ③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자아라고 보지 말고,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라고 보라 하는구나. 나에게서는 ’내가 있다‘는 사량분별이 떠나지 않는데 어떻게 눈을 무상 고 무아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악어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해낼 수 없는 말들을 들려준 이 사람들도 풀어주었습니다.
사람6이 말했습니다. “눈에는 눈의 달콤함이 있습니다. 눈의 달콤함이란 눈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답답합니다. 그런데 눈을 뜨면 보이니까 답답한 마음이 다 사라지고 상쾌해합니다. 이렇게 눈을 뜨면 보아서 좋으니 이런 것도 눈의 달콤함일 것 같습니다. 달콤함이 있으니 거기(눈)에 속박됩니다. 그러나 눈에는 눈의 위험함도 있습니다. 눈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이 눈의 위험함입니다. 그런데 눈으로부터 벗어남도 있습니다. 눈에 대한 욕탐을 길들이고 욕탐을 제거하는 것이 눈으로부터 벗어남입니다.”
사람7, 사람8, 사람9, 사람10, ... 등 많은 사람들이 육처 상윳따(S35)의 내용을 말했습니다.
악어가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눈은 물질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무상, 고, 무아를 거쳐 눈의 달콤함, 눈의 위험함, 눈의 벗어남을 말하는구나.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 의와 법을 일체라 한다 하더니, 보는 것과 보이는 것과 관련된 것은 눈과 색이 <모두, 다> 이겠구나. 눈과 색을 조건으로 안식이 일어나서 죽 진행되는구나. 즉, 보고 보이는 것과 관련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안-색-안식에서 비롯되어 진행되는구나. 거기서 진행되어 관련된 느낌들, 관련된 해롭거나 유익한 마음들, 관련된 해롭거나 유익한 의도들이 일어나고 ... 이것이 바로 눈 등의 특별한 가르침이고 과학이 설명하는 눈과 다른 점이구나.’
악어는 모든 사람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날 뒤부터 악어는 사람들을 잡아먹지 않았고,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 온 사람들을 모두 구해주었습니다. 악어는 화살에 맞은 한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행자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눈의 감각기능(眼根)을 단속해야 합니다. (인용 - 만약 안근(眼根)을 제어하여 머물지 않으면 간탐(慳貪)과 불만(不滿)과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흘러들어 올 것이므로, 그는 단속하기 위해 실천하고, 안근(眼根)을 보호하고, 안근(眼根)에서 단속합니다.) ...”
며칠 뒤 악어가 사는 못 근처의 큰 나무 아래에서 재가자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눈의 감각기능(眼根)’과 ‘눈(眼)’을 이렇게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눈은 물질입니다. 그런데 눈이 저것을 볼 때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새로 생겨납니다. 이때 여러 가지 해로운 마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유익한 마음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①눈(眼)은 물질이고, ②눈을 문으로 하거나 토대로 하여 일어난 해롭거나 유익한 마음들은 마음들이고, ③눈의 감각기능(眼根)은 *볼 수 있는 기능이고 *눈으로 볼 때 해로운 마음들이나 유익한 마음들이 많거나 적게 일어나게 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옆의 재가자가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볼 때 무상, 고, 무아로 보면 그에게는 점점 욕탐이 없는 상태에서 형상을 보게 될 것이므로, 그는 눈의 감각기능을 보호하면서 단속하면서 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볼 때 형상을 상락아정으로 보게 되면 그는 눈의 감각기능을 보호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아서 그는 점점 욕탐이 있는 상태로 보게 되어 해로운 마음들이 증장한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재가자가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육입(六入)의 눈(眼)에 대해 한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눈은 물질입니다. 눈이 색을 볼 때 안식이 일어납니다. 이 셋이 화합하면 촉이라고 합니다. 이때 (해롭거나 유익한) 다른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연기의 다른 지분들이 죽 진행됩니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과학에서 말하는 눈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눈이 다른 한 가지 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法)에 대해 생각하며 (0) | 2019.06.27 |
---|---|
'의 - 법 - 의식' 에서 의(意)를 생각하며 (2) (0) | 2019.06.12 |
'나는 오온이다'는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0) | 2019.06.04 |
의(意)에 대해 생각해보며 (0) | 2018.06.23 |
일체유심조 / 눈-달 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0) | 2018.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