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 :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기 보다는 ‘자기 존재란 무엇인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손자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손자가 중3이 된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지금 제 친구들은 자기 자신을 찾으러 모두 길을 떠났어요. 방학동안 현자들을 찾아다니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알아오겠다며 갔어요. 저도 나 자신을 찾고 싶어요.”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래,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은 아주 대단한 일이란다. 그러고 보니 요즘 가나는 그런 물음으로 고민하고 있었구나. 그래,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정말로 큰 주제일 수도 있겠구나.”
노인은 잠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철학개론을 들으며 철학적 물음으로 사색했던 날들,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주제들에 대해 친구들이 존재와 신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던 순간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서 숫타니파타를 구입하여 그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고 ‘세상에 욕망을 끊은 분이 계시다니’ 하면서 깜짝 놀란 일들. ... 그런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는 손자가 자기 자신을 찾아보겠다고 하니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과연 이 말들을 손자가 이해할 수 있을지.
노인이 말했습니다. “가나야, 우리 모처럼 의미 있는 대화를 한번 나누어 볼까? 내가 물을 테니 가나는 배웠거나 들었거나 사색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대답해 보려무나. 자, 만약 옆집의 김철수가 ‘나는 구구인가?’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니?” 손자가 말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야, 김철수, 너는 그것도 모르니? 누구긴 누구야, 너는 김철수지.’ 하고 대답해요.” 노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저기 송아지가 말을 해서 ‘가나야, 나는 누군지 아니?’ 하면 그때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손자가 말했습니다. “송아지는 송아지니까, ‘너는 송아지야.’ 하고 대답하겠어요.”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가나가 철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나는 누구지?’ 하고 물으면 철수가 어떻게 대답할까?” 손자가 말했습니다. “아마도 ‘야, 네 어디 아프나? 너는 송 가나잖아. 송 가나.’ 할 거에요.” 노인이 그럼 송아지에게 물으면 하니, 손자가 송아지는 ‘저는 송아지이고, 주인댁 아드님은 송 가나에요.’ 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노인이 그윽이 미소를 짓자 손자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나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의미 있는 답변이 아닐 것 같아요.”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래, 많은 사람에게는 내 대답이 바른 답이 아니겠구나. 그런데 만약 물음이 의미 있는 대답을 이끌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르게 물어야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으면 이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그렇게 밖에 답이 안 나온단다.” 손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 어떻게 물어야 의미 있는 답변이 나올 수 있나요?” 노인이 말했습니다. “여기에 가나도, 가나 엄마 아빠도, 할아버지도, 옆집 김철수도, 가나 친구들도, 저기 송아지도, 저기 강아지도, 숲 속의 다람쥐도, ... 모두는 태어나서 한 평생 살다가 늙어 죽는단다. 그래서 아마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저기에 각각 태어나서 한 평생 살다가 늙어 죽는 이 ‘자기 존재는 무엇입니까?’ 하고.”
손자가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과 ‘자기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같은 것으로 생각되어요.”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가나는 15년 전에 태어나서 자랐고, 앞으로 계속 공부하고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고 그렇게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란다. 그래서 여기에는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을 필요가 없다고, 이런 쪽으로 생각을 기울여야 해. ‘아, 이것은 필요 없는 물음이구나.’하고 자꾸 이렇게 생각해야 한단다. 마치 원래부터 비가 숨어 있다가 지금 내리는 것이 아니고 내리는 이 순간에만 ‘비’라고 이름 하듯이(어느 동영상 법문에서 들은 표현임), 홍길동도 원래부터 홍길동이 있었는 것이 아니고 당시에 태어나서 한 평생 살아가는 그 시기의 사람을 홍길동 자신이라고 한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한 평생 살아갈 때 나 자신이라고 하면서 살아간단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기 보다는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묻는 것이 바른 물음에 속한단다.”
노인이 계속 말했습니다. “한편, ‘김철수, 철수 엄마 아빠, 송 가나와 엄마 아빠, 할아버지, 저기 송아지와 강아지, 숲속의 다람쥐, ...’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짐승이라는 각각의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어. 그래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이 각각의 존재들이 무엇인지 ‘자기 존재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것은 바른 물음이고 의미 있는 물음이고 의미 있는 대답을 필요로 하는 물음이란다.”
그러나 손자는 아직 할아버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되자 아래 마을 서당에 명심보감을 배우러 갔습니다. 손자는 어제 배웠던 한 대목을 암송했습니다. 荀子曰 無用之辯과 不急之察을 棄而勿治하라 (순자가 말하였다. 쓸데없는 말과 급하지 않은 일은 버려두고 다스리지 말라.)
후기
경에는 색은 ‘나가 아니다’고, 수, 상, 행, 식은 ‘나가 아니다’고 자주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후대의 어떤 분들은 ‘나는 오온이다’고 하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온을 나가 아니라고 관찰하라 하셨는데, 후대의 어떤 분들은 나는 오온이라고 하여, 사람들을 혼란시키고 두 번 일을 하게 하는구나.’ 하고. 이에 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대신에 ‘자기 존재란 무엇인가?’로 묻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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