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다음 날 오전에 다성은 다시 삼일 마을의 도서관에 갔습니다. 책을 읽다가 한 대목을 보았습니다. “한훤당 김굉필이 ‘마음이 어느 곳에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일두(정여창)는 ‘있지 않는 곳도 없고 또한 있는 곳도 없다.’ 하였다. (... 寒暄堂曰 心在何處 一蠹曰 無乎不在 亦無有處 : 해동속소학, 성백효 역주, p.238)
다성은 그저께와 어제는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식(識)과 심(心)을 배워서 지식이 조금 쌓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위의 글을 만나니 또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의기소침해 있는데 갑자기 한 가지 어떤 앎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모른다고 하면 아는 것도 모르게 된다. 그러나 이제부터 아는 것은 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보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저께하고 어제 다성은 마음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지식도 얻었고 이해도 좀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성은 그 지식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뜻을 깊게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누가 마음은 ‘있지 않는 곳도 없고 또한 있는 곳도 없다.’고 하시더라도, 주눅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만 배운 것을 잘 간직하면서 깊이를 더해간다면 자신은 그 정도만큼의 앎은 지닌 셈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청명하고 햇볕이 따뜻했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학생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으로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다성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더니 가로수 가지가 꺽여진 곳에 목이 딱 걸리고 말았습니다. 학생이 억하면서 비틀거렸고 다성이 달려가서 몸을 잡았습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고, 스마트폰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학생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다시 스마트폰을 보면서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늘 아침 칠지가 해준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다른 생각에 빠지면 길을 걸으면서도 눈으로는 못 보는 것이 많아요. 그것은 내 마음을, 보아야겠다는 데 두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가 눈에 마음을 주목하여 볼 때, 그때는 마음을 마노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다성은 칠지의 이 말이 번쩍 생각났던 것이었습니다. 저 학생도 마음을 다른 곳에 두었기 때문에 눈으로는 바로 앞의 꺾여진 나뭇가지도 못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다성은 이장님을 찾아가서 마을에 공부를 하신 어른이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이장은 저 언덕 위에 운하불학 노인이 사시는데 그분은 우리 마을에서 학식이 제일 높다고 했습니다. 다성이 그분을 찾아뵐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물으니, 그분은 귤을 좋아하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성이 마을 시장에서 귤과 떡과 음료수를 사서 길을 물어물어 운하불학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다성이 자기소개를 하고 몸은 편안하시고 건강하시며 생활에 불편은 없으신지 안부를 물었습니다. 운하불학 노인은 잘 지낸다고 하면서 다성의 안부도 묻고 또 이렇게 음식을 사 가지고 오셨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방안은 깨끗했고 작은 책장에는 종교 서적과 유학 서적들이 빽빽했습니다. 다성은 여기 오게 된 연유를 말씀드리고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은지를 물었습니다. 운하-노인은 기쁜 마음으로 아는 것이 있다면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성이 질문 드렸습니다. “저는 마음이 세 측면으로 되어 있다는 이론을 막 배웠습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조건에 따라서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심과 식에 대해서는 막 배웠습니다. 그런데 아직 의(意)애 대해서는 못 배웠습니다. 의를 그 이론에서는 마노(mano)라고 불렀습니다.”
운하-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장하십니다. 그런 이론도 다 배웠군요. 그 이론은 저기 어디 서쪽에 있다는 한 위대한 영웅의 말씀인 것 같군요. 예, 저도 젊은 시절에 그 이론을 배웠지요. 처음에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사유하고 공부하여 이제는 조금이나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 마음이 몸과 함께 할 때, 그때의 마음을 마노(mano, 意의)라고 이해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다성은 마노(mano)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한자로 의(意)를 풀라고 하면 ‘소리 음(音) + 마음 심(心)’이니까 ‘마음에서 이리저리 가려고 소리내는 것’이라고 풀면 그럭저럭 될 텐데, 마노라고 하니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마음이 몸과 함께 할 때 마노라고 부른다고 하니 무슨 뜻인지 점점 모르게 되었습니다.
운하-노인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때 한 사람은 길거리에 떨어진 지폐를 보았습니다. 5만 원짜리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걸어서 지폐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인지요? 바로 한 사람은 눈에 마음을 두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귀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몸의 감각기관에 주의를 둘 때, 또는 몸의 감각기관에 주목할 때, 그때의 마음을 마노(mano, 의意)라고 부릅니다.”
다성이 생각하기에 심의식(心意識)이라는 이론은 보통 우리가 아는 사실을 자꾸 새로운 용어로 설명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일상에서 한눈팔면 넘어지는 것은 예사듯이 자기가 하는 그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실수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심의식의 이론에서는 그런 당연한 사실에 자꾸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 다성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운하-노인이 이어서 말했습니다. “또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행위하기도 하고 말로 행위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때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몸으로 드러내고 말로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몸으로도 말로도 드러내지 않고 그냥 마음속에서 사유하다가 그만 둘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도 마음을 마노(意)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유는 심(心)이 자신 말고 다른 대상(식(識)을 생겨나게 만든 처음 그 대상)으로 향해가서 진행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운하-노인은, 마음이 감각기관으로 사용될 때 짝을 맞추기 위해서 붙인 이름인, ‘마노(意)-담마(法)’할 때의 그 마노는 여기 논의에서 제외하자고 했습니다.
다성은 운하-노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운하-노인의 이 말씀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성이 전혀 못 알아듣자 운하-노인이 그 부분은 넘어가자고 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운하-노인이 심의식을 전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하려면 마음을 눈에 두거나 귀에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눈에 두어 보려고 하거나 귀에 두어 보려고 할 때는 <마노(意)>라고 부릅니다. 즉,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에 주목하여 대상을 감각하려고 할 때는 마음을 마노(意)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제 마노가 눈에 주목하여 저기 형색을 보면 눈의 식(識)이 생겨납니다. 즉 ‘저것은 자동차다.’ 하고 알게 됩니다. 이때는 분별하여 아는 마음이니까 <식(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눈, 귀, 코, 혀, 몸, 마노’로 각각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담마(法)’를 분별하여 알면, 그때는 각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새로운 마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다성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운하-노인이 계속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식(識)은 자기 활동성을 가져서 내면에서 어떤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활동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식이 내면에서 어떤 인식 과정을 더 진행하는데, 우리 같은 범부는 이 과정에서도 잘못된 것들이 개입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만들어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식은 이름이 심(心)으로 불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들 마음은 대개 이렇게 탐, 진, 치로 물들어있는 심(心)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오염된 상태의 마음(心)을 원인으로 (처음 식이 일어나게 한 그 대상을 향해 행위하러 가는데) 사유하기만 하고 그치는 경우도 있고(意業), 말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口業), 그것이 몸으로까지 드러내어 행위 하는 경우도 있다고(身業) 했습니다.
다성이 운하-노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예를 하나 들어보았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는 빵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길을 걷는데 어느 날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는 일에 집중하여 빵가게에서 나는 냄새를 못 맡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편안하게 길을 걸었더니 무슨 냄새가 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코에 주목해서 냄새를 맡았습니다.(마노(意)) 갑자기 향긋한 빵 냄새가 났습니다. 즉, 마노가 코에 주목하여 냄새를 맡았더니 빵 냄새였습니다.(식(識)이 생겨남, 그중에서도 비식(鼻識)이 생겨남)
‘즐겁다’라는 느낌도 발생했습니다. 이제 생겨난 식(識)은 내면에서 빵냄새와 즐거운 느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했습니다. 이때 어떤 나쁜 요소들이 이 과정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래서 탐, 진, 치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이름을 식에서 심(心)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마음(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물들었습니다. 이런 물든 마음(心)을 원인으로 하고 조건으로 하여 우리는 행위를 합니다. 빵을 먹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意業) 길을 걸어갈 수도 있고, 빵을 먹고 싶다고 말만 할 수도 있고(口業), 빵을 사러 직접 가게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身業) 그런데 우리는 이런 빵 때문에 탐욕부리고 성내고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성이 자신이 이해한 것을 말씀드리자 운하-노인이 훌륭하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다성이 조금 더 물어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마음을 심의식으로 나누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말씀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운하-노인이 말했습니다. “마노가 감각기관에 주목하여 대상을 볼 때 간섭하는(참여하는) 나쁜 요소가 있습니다. 또 식이 느낌을 분별하여 아는 인식과정에 참여하는(간섭하는) 나쁜 요소가 있습니다.
또 심(心)이 대상을 향해 행위하러 갈 때 단속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팔다리에 병이 나면 팔다리를 치료해야 하고 몸속에 병이 나면 몸속을 치료해야 하고, 뇌에 병이 났으면 뇌를 치료하듯이, 심, 의, 식에 각각 간섭하여 우리를 병들게 하고 나쁜 길로 가게 하는 요소들이 다 다르고, 치유하는 위치도 방법도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구분을 하는 것이지요.“
설명을 듣고 보니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 더 이해되는 것 같았습니다. 다성이 어제 프린트해온 자료를 보여드리며 모르는 것을 또 물어보았습니다. 운하-노인이 안경을 끼고 다성이 건넨 자료를 검토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저께 뇌○○ 학술발표회에서 질문자로 나선 바로 그 노인이었습니다. 운하-노인은 조목조목 짚어주면서 그 뜻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이제 다성이 칠지가 말해준 문제를 마지막으로 물어보았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마음에는 무의식도 있고 잠재의식도 있고 초월의식도 있습니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운하-노인이 말했습니다. “무의식을, (마노와 담마를 조건으로 한(意-法)) 의식(意識)말고, 무엇인가 내면에 있는 식(識)이라고 말한 것이라면, 그것은 식의 무더기(識蘊식온)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식의 무더기에는 과거의 식들, 미래의 식들, 현재의 식들이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즉 무의식이 아니고 식의 무더기(識蘊)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잠재의식의 경우에는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2가지로 말할 수 있겠군요. 첫째는 앞에서처럼 식의 무더기(識蘊)로 표현하는 것이고, 둘째는 식(識)에 잠재하는 것은 내적 경향성(想상)이니까 내적 경향성들의 무더기(想蘊상온)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즉 둘째는,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가치관, 견해, 태도 등이 경향성으로 굳어 잠재한 것을 잠재의식이라고 불렀을 테니, 내적 경향성의 무더기(想蘊)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초월의식은 지혜가 식(識)과 함께 한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초월의식이라는 말을 하면 이상해지니까 그냥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부분들은 제가 배운 것을 추론한 것임, 그래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
다성은 이제 물러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며 큰 절을 올렸습니다. 운하-노인이 언덕길 아래까지 배웅해 주었습니다. 오늘 밤을 지나면 삼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내일 다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삼일 동안 다성은 큰 공부를 했습니다. 마음에 대한 지식을 좀 얻었습니다. 물론 지금 다성은 마음을 직접 알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마음일 때만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잠시 앉아 며칠 동안 배운 지식으로 질문과 답을 하나 만들어보았습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아는 것이고, 배우지 못한 다성과 같이 무식한 범부에게 마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들께서는 이런 탐, 진, 치를 제거하셔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빛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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