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들으며 필기하면서 나름대로 일부를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이해하여 제 글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제 글은 단지 참고로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어떤 것을 눈으로 보게 되면, 우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①‘저것은 살구나무다’라고 압니다. (새로운 식이 생김, 새끼쳐진 식이 생김, 새로운 마음이 생김)
②그리고 살구나무에 따른 느낌이 일어납니다(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즐거운 느낌이거나 괴로운 느낌이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느낌을 경험함)
③이것을 일차인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2. 그 과정은 어떠합니까?
①눈이 저것을 봅니다.
②이때 욕탐이 개입합니다.
③본다는 것은 눈과 저것 뿐만 아니라 제삼자인 ‘욕탐(무명의 요소)이 함께 합니다.
④그러니까 일차인식은 ‘눈 + 색 + 욕탐’ 이 세 가지가 함께 합니다.
⑤지금부터 특별한 말이 없으면 모두 중생을 기준으로 하는 내용입니댜.
3. 일차인식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①식(識)(이라는 새로운 마음)을 만들고
②수(受)라는 느낌을 경험했습니다.
③즉, 외입처에 대한 앎(이 생겼고, 그 새끼쳐진 마음은 활동성을 가짐), 법우님에 대한 즐거운 느낌을 경험했다 여기까지가 일차인식입니다.
4. 일차인식으로 인식이 끝납니까? 아니면 이어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①새로 생겨난 식은 마음이라서 활동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차인식을 합니다.)
②그 식이 주관이 되어, 방금 전 일차인식때 함께 생겨났던 수를 객관으로 삼아 인식합니다.
③이때는 상(想)이 개입합니다. 특히 상이 병든 것을 번뇌라고 부릅니다. (상은 치유될 수도 있습니다.)
④일차인식때는 내입처 + 외입처 + 욕탐이었다면 이차인식때는 ‘식 + 수 + 상’입니다.
⑤상이 병들었다고 하면 어떤 측면에서 병드는가 하면, * 존재에 대한 오해는 ‘상락아’로 병들었고, 그래서 상락아한 것을 정(淨)이라고 봅니다.(그러나 원래는 무상고무아부정이 현실입니다.)
5. 상(想)이 병들었다 에 대해
①그런데 중생에게는 상이 병든 정도가 다릅니다. (존재를 상락아정으로 보는 경향성이 서로 다릅니다.)
②그래서 어느 정도 상이 병들었는가에 따라 욕계중생수준으로 잘못 병들었는가, 색계 중생으로 ..., 무색계 중생 수준으로 ... 에 따라 경향성의 병듦에 따라 욕상(욕계 중생 수준의 상), 색상, 무색상이라고 합니다.
③참고로 상은 어떻게 생겨납니까? 이차인식과정이 조금 더 진행되면 병든 상 때문에 탐진치가 생겨나서 갈애가 만들어지고, 갈애가 만들어지면 갈애라는 오염된 마음이 원인이 되어 오염된 행위를 하게 되면 그 오염된 행위가 상을 잠재하고 식을 머물게 합니다. (대체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상이 생깁니다.) 즉, 오염된 행위 때문에 잠재해서 쌓여있는 것, 삶의 과정의 결과로 쌓여 잠재해 있는 것이 상입니다. 경향성으로 쌓여 있는 것입니다.
④요금 힐링 이란 말을 쓰는데, 힐링 중에 완성된 것, 힐링의 완성 자리가 상의 병듦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6. 이 경향성은 어떻게 참여합니까?
①식은 윈냐나이고, 하는 일은 위자나띠(분별해서 안다)입니다.
②상은 산냐이고, 하는 일은 산자나띠(함께 안다)입니다.
③알긴 아는데 어떻게 아는가 하면 함께 안다입니다. (일차인식때는 욕탐이 나도 함께 보자고 하듯이, 그때 우리는 니밋따를 보지 못하고 욕상으로 봅니다.) 상은 좀 더 구체적으로 분별해서 아는데, 식이 윈냐나 하는데, 식은 인식작용의 주체인데, ‘식 너 혼자 하려고 하지 마, 나도 있어’, 라고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경향성이 식의 이차인식에 끼어듭니다. 즉 이차인식때에는 함께 아는 일을 하는 것으로의 상이 참여합니다.
④참고로 인식은 일차인식에서도 삼자이고, 이차인식에서도 삼자입니다.
⑤결론하면, 상은 경향성으로써, 이차인식에서 아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자입니다.
7. 상(想)이 함께 안다는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①존재를 상락아라고 보고, 그런 존재를 정(淨)이라고 보는 병든 상이 함께 하여 - 식이 느낌을 인식할 때, 상은 그 느낌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항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②즉 법우님을 보고 법우님이라고 아는 데서 행복한 느낌을 경험했는데, 즉 새끼쳐진 식이 지금 경험한 즐거운 느낌을 분별하는데(이차인식), 여기서 식이 자기 혼자서 분별하는 것이 아니고, 상이라는 것이 함께 봅니다(인식합니다).
③이때 병든 상이 왜곡해서 봅니다. ‘이 즐거운 느낌이 항상하는 것이여, 본질적인 것이여,’ 하면서 봅니다.
④즐거운 느낌을 항상한 것이라고 보면, 이 느낌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항상한 것이라고 보는데, 이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고집멸도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항상이라고 잘못 아는 것이 무명과 일치하므로 무명이라고 합니다.)
⑤지금 경험한 이 느낌이 지속되는 즐거운 느낌이라고 왜곡해서 알아서, 원래 무상한 것을 지속된 것이라고 잘못 아는 것(앎)이 무명입니다. 즐거운 느낌을 지속적인 것으로, 지속적인 즐거운 느낌으로 잘못 알려집니다. 이것이 무명입니다.
8. 탐, 진, 치의 나타남
①그래서 ‘나는 이것을 잡아야겠어.’ 라고 잘못아는 상태가 뒤따릅니다. 붙잡아야 하는 즐거운 느낌이라고 잘못 아는 것이 탐입니다.
②한편, 누구를 보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했는데, 상이 작용하여 그 괴로운 느낌을 지속적인 느낌이라고 잘못 알아서 배척합니다. 이것을 진이라고 합니다.
③‘붙잡는다’거나 ‘배척한다’는 이것이 불교에서 무조건 배척되는 것은 아닙니다. 호흡수행은 호흡을 붙잡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④그러나 탐은, 사실 느낌이 무상한 것인데 이것을 항상하다고 오해하여 이 느낌이 변하는 데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 알고서 그 위에서 붙잡으니까 탐이 생기고, 탐은 괴로움을 만듭니다.
⑤마찬가지로 진(瞋)도, (고멸이 괴로움이 싫어하여 밀쳐내는 것인데, 밀쳐내는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느낌이란 원래 무상하고 그래서 불만족스러운데, 이것을 항상이라고 잘못 알아서 지속적인 괴로움이라고 왜곡된 앎을 만들어서 사실이 아닌 상태에서 밀어내니까 괴로움을 만듭니다.
8. 요약
①상이 병들어 있으면 번뇌라고 하고, 한자로는 루(漏)라고 합니다.
②상락아(常樂我)에서 정(淨)까지 나아가는 것은 무명루라고 합니다. 욕계 수준으로 상이 병들면 욕루라고 하고, 색계, 무색계 수준의 번뇌는 유루라고 합니다.
③왜곡된 앎으로의 ‘무명’과 ‘번뇌’를 더하여 ‘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탐, 진, 치가 나옵니다. 어쨌든 불교에서 괴로움을 만드는 모든 원인은 탐, 진, 치입니다.
④그 탐, 진, 치는 - 이차인식의 조건으로 참여하는 번뇌가 병든 상으로 간섭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즉 이차인식의 결과로 생겨나는 ‘탐, 진, 무명’, 그리고 이차인식에 조건으로 참여하는 ‘번뇌’가 합하여 : 이차인식의 조건-결과인 이 부분을 합하여, 어쨌든 (생겨난) 잘못된 상황을 탐, 진, 치라고 부릅니다.
⑤그리고 탐, 진, 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유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치유된 상을 경전에서는 잘 안 쓰는 것 같은데, 중국에서는 무루라고 표현합니다.
⑥치유된 상태로 상이 참여하면 결과가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탐과 진은 - 무탐, 무진으로 생기고, 그래서 무루와 명을 더하여 무치라고 하면, 무탐, 무진, 무치가 됩니다. - 이런 삶을 부르는 말이 무위라고 합니다.
⑦대략 나의 내면에서 새끼쳐진 식이 수를 상의 개입하에 분별하는 이차인식을 통해서 요런 조건과 요런 결과를 통해 탐, 진, 치가 정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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