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념처경 - 신념처1[호흡수행 준비과정 - 경전해설](부산 수행 170523)
[동영상] ☞ https://youtu.be/UWohAObdndI
(1시간 9분58초 ~ 1시간 18분 24초)
4. 사띠가 무엇을 하는 것인가요?
사띠가 무엇일까? 사띠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일까? 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오해가 좀 있어왔습니다. 아마도 사띠에 대한 오해 때문에 이 선을 여기서 끊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거꾸로 여기서 안 자르고 저기서 잘랐기 때문에 사띠에 대해 오해가 생긴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사띠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이 구문을 (우리처럼 안 자르고) 여기서 잘랐다고 하면, ‘전면에 사띠를 확립한다.’가 됩니다. 사띠가 어디로 가는가 하니, 자, 일단은 그동안의 해석, 다른 분들의 해석을 보면, 사띠가 가는 곳이 ‘빠리무캉’이지요. 콧구멍 입구, 신근을 찾아가는 거지요. 여기를 찾아간다는 것은 여기에 닿는 촉이라는 대상을 찾아간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자리인데, 사띠를 그동안 해석한 것에 따르면, 우리를 제외한 모든 해석이, 사띠한테 어떤 일을 시켰는가 하면, ‘대상을 잡아라’고 시킨 겁니다. 수행이 어차피 ‘놓치지 않는다, 붙잡아야 한다.’ 이지요. 놓치면 되돌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기존의 해석에서) ‘빠리무캉에다 사띠를 확립한다’는 이 이야기는 사띠보고 대상한테 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대상을 붙잡는 일은 누가 하나요? 이것은 그야말로 내입처와 외입처의 관계이잖아요. 마노가 신근한테로 가서 신근과 함께 촉이라는 대상을 작의해 가지고 위자나띠, 그래서 식을 만드는 이 과정이잖아요. 수행이라고 해서 사는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기존의 해석은 사띠보고 마노가 할 일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 차이에요.
그런데 지금 저는 어떻게 해석하나요? 우리는 사띠보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마노를 발견하라’, 이렇게 하는 거지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라고 하는 이 수행 기법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했나요? 사띠가 무엇인가요? 마음의 현재를 발견함으로써 일단은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를 발견해내야,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 판단해서, 그름은 버리고 옳음으로 돌아가서 옳음을 유지 향상하는, 이것이 불교를 대표하는 수행기법이라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말한 거잖아요.
사띠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사띠가 대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띠는, 대상을 쫓아가야 하는 요 마음이 그것을 잘못할까봐, 마음을 도와서 그 일을 잘 하기 위해서 마음을 찾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쳐다보고 마음의 현재를 발견하는 그 일을 통해서, 잘못하면 되돌려 가지고 향상으로 이끄는 이 일을 사띠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대념처경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4개월의 준비과정을 거치면서 기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상당히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즉, ‘마음이라는 눈이 사띠에 의해서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눈을 뜬다. 그러면 빤냐라고 하는 이어지는 기능이 불을 비추어서 본다. 흔들리지 않으려니까 삼매라는 기능과 함께 한다.’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직접 보는 자, 직접 행위하는 자는 ‘나여, 내 마음이여.’ (입니다.)
그것 잘못되는 일을 막아주기 우해서 마음을 도와주어 삶을 향상으로 이끌자고 제시되는 것이 다섯 가지 기능입니다. 여기서 바로 그 부분에 마음하고 기능하고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어떻게 역할이 다른지가 사실은 그동안에 (기존의 해석에서는)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무애해도(쿳다까 니까야에 속함)라는 경전에서도 그렇게 나와요. 그리고 이후의 모든 교재들이 그렇게 말을 하지요. 사띠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가 하면, 예를 들어 들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기에 속이 빈 호박이 하나 있어요. 속빈 호박을 하나 물에 던져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둥둥 뜨지요. 그럼 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어떻게 되나요? 돌멩이를 던지면 물에 가라앉겠지요. 사띠보고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속빈 호박처럼 표면에 들떠있지 말고 돌멩이처럼 대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해요. 그런데 물론 이것(이런 설명)도 마음하고 사띠하고 연결된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면 타당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러나 구체적으로 보면 정말로 ‘돌멩이처럼 깊이 들어가자, 대상을 확실하게 붙잡자, 대상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면 그 주체는 사띠가 아니고 마노입니다. 사띠는 마노가 그 일을 못할까봐 사띠가 힘 있어지는 것만큼 마노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겁니다. 최소한 우리가 해석하는 ‘삶의 메커니즘, 마음 이야기, 수행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다섯 가지 기능의 이야기’, 이런 해석에서 보면 (우리의 이해가) 맞는 거지요.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그렇게 말한 거예요. 사띠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어 (기존의 번역에서는) 여기를 끊어 ‘전면에 사띠를 확립한다.’로 이해했는지, 아니면 이 구문을 잘못 끊어 놓고 해석을 하려다 보니 사띠를 그렇게 설명해야 했는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마음과 사띠가 그 역할의 측면에서 구분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구분되지 않아서 (이 구문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서는) 오류가 생겼다고 말하고 싶어요.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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