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장구 간단히

대학장구 경1장을 들으며 10 (물격자물리지극처무부도야~)

풀빛 너머 2017. 2. 23. 12:45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脩 身脩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物格者 物理之極處無不到也. 知至者 吾心之所知無不盡也. 知旣盡 則意可得而實矣. 意旣實 則心可得而正矣. 脩身以上 明明德之事也 齊家以下 新民之事也 物格知至 則知所止矣. 意誠以下 則皆得所止之序也.


(강의 필기 중에서)

* 물격자(는) 물리지극처(가) 무부도야(요) : 물격은 사물의 이치(물리)의 지극한 곳에 (물리의 표준점이 되는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내가 궁구해서 밝혀내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


* 지지자(는) 오심지소지(가) 무부진야(라) : 지식이 지극하다는 것은 내 마음이 아는 곳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물리지극처 오심지소지무불진야가 짝이 됨. 무불도극처인데 뒷 문장과 대구를 맞추기 위해서 도치시킨 것, 극처에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


* 지기진(이면) 즉의가득이실의(요) : 지식이 이미 극진해지면 생각이 진실하게 될 수 있으며

* 의기실(이면) 즉심가득이지의(라) : 생각이 진실해지면 마음이 바르게 될 수 있다.


* 수신이상(은) 명명덕지사야(요) : 수신 이후의 일은 (물격 지지 의성 심정 신수) 밝은 덕을 밝히는 일이고

* 제가이하(는) 신민지사야(라) : 제가 이하는 (제가 치국 평천하)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 물격지지(는) 즉지소지의(요) : 사물의 이치가 궁구되고 지식이 지극하다는 것은 머무를 바를 아는 것이고

* 의성이하(는) 즉개득소지지서야(라) : 생각이 진싫하다는 그 이하는 모두 머무를 바를 얻는 차례이다


(소주에 하나만 읽고 가겠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말씀드리기를, 명명덕에 해당되는 조목이 격물치지이고 성의이고 정심이고 수신이지요. 신민에 해당하는 것이 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지요.

명명덕과 관련하여 계속 들어야 합니다. 옥계노씨가 명명덕에 대한 강령과 조목간의 관계를 설명해줍니다. 일부를 의역하면 ‘물격은 물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지지는 내 안의 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입니다.



(강의 필기 중에서)

지난 번에 제가, 격물은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치지에서 지각 식별의 인식 능력이 극대화된다고 했습니.(지는 지각 식별의 인식 능력). 간단히 말씀드리면 내가 만물에 속해있는 이치에 대해서 궁구하면 그 궁구한 것을 통해서 그 물속에 깃들어있는 어떤 이치를 얻습니다. 그러면 내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지각 식별 능력이 확대된다고, 결국 주자학은 나의 내면의 타고난 지각 인식 능력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인 것 같습니다.


그럼,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어떻게 나의 내면의 지각 인식 능력을 확대하는가요? 우주에는 이(理)가 편재합니다, 우주 어디에도 널려 있습니다. 우주 안의 이는 나도 받고 일반적인 물도 받아요. 개도 받도 소도 받아요. 이치가 편재함으로 인해 물에 대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곧 나에 대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철학적인 연계망이 있습니다. 서로 상통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 경문을 떠나서 주자학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를 묻는다면, 저는 주자학을 소통의 철학이라고 봅니다. 막혀 있는 무엇을 뚫어서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본연지성)이 다 있지만, 인간은 이것을 ①태어나면서는 기질에 의해서, ②살아가면서는 인욕에 의해서, 선천적인 명덕이나 지각 인식 능력을 잃어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몸은 피부가 싸여있어 외부 세계와는 떨어져 있습니다. 외부 세계와 떨어져 있는 내가 외부 세계와 나를 막고 있는 장벽을 뛰어넘어 외부와 소통하는, 그런 소통론의 측면에서 주자학이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이 문장은 물격이후에 지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자가 物格者 物理之極處無不到也.물격자 ‘물리지극처 무부도야.’라고 한 것을 우리나라 조선 시대 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에 토를 어떻게 다는가에 따라 해석이 다르게 됩니다.

物格者 物理之極處無不到也.

1. 물격자(는) 물리지극처(가) 무부도아(라)

2. 물격자(는) 물리지극처(에) 무부도아(라)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번역본에는 토가 어떻게 되어 있나요? ‘-가’로 토를 다는 사람이 있고, ‘-에’ 토로 다는 사람도 있어요. 이언적 같은 분은 ‘-에’ 토로 달았습니다. 물격은 물리의 극처“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가 됩니다.

그럴 듯하지만 어떤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 인식을 사물에 대해서 하는 인식 과정이 필요한데, 물격 앞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퇴계 선생도 처음에는 ‘-에’ 토를 달다가 ‘-이’ 토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물리의 극처“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로 해석했습니다. 미묘한 차이인데 제가 어렵게 설명한 것 같습니다.


‘2. 물격자(는) 물리지극처(에) 무부도아(라)’로 해석하면, 이것은 주체가 인간인 나입니다. 내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해서 사물의 극점에 가서 내가 사물의 극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에’ 토는 물리(物理)가 자기 스스로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겁니다. -에토로 달면 인간 중심으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해서 내가 풀어내는 것입니다.


‘1. 물격자(는) 물리지극처(가) 무부도아(라)’로 해석하면, 이것은 ‘~이’ 토를 단 것이고, 인간이 인식하는 동시에 물리가 스스로 자기 본모습을 환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토는 물리가 활물(活物)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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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는 일전에 이(理)는 조작도 없고(만들어 내는 것도 없고) 정의(희로의 감정도 없고, 계도(예지, 예측)도 없다고 했습니다. (무조작 무정의 무계도 無造作, 無情意, 無計度) 이것은 이가 살아있는 그런 것(활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느님처럼 분노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거나, 만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 토가 아니고 ~이 토로 달면 이가 활물이 되어서 여기서 주자의 설명과 어긋나는 것이 좀 있습니다.

제 생각은 우리나라에서 주자학을 받아들일 때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이(理)에다 살아있는 활동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