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성,재등록과수정

3. 무명(無明)에 대해 배우며

풀빛 너머 2019. 12. 28. 19:34

이 글은 <빤디따라마 위빳싸나 명상센터>에서 유튜브에 올려주신 동영상 법문,

20190609_정기법회_12연기법문(02) 20190623_정기법회_12연기법문(03)의 내용을

좀 필기해놓았다가 발표자의 따옴표(“~”)에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속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가 잘못 듣고 잘못 필기했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3. 고성제를 모름

빙청 선인 일행이 도착한 곳은 <인공지능 도시>였습니다. 과학자들이 많은 인공지능 로봇들을 만들었는데, 학교에서 관공서에서 경찰서에서 시장에서 길거리에서 인공지능 로봇들이 사람을 대신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과 소통하며 마치 반려견처럼 인간의 친구가 된 이공지능 로봇들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이것 해다오, 저것 해다오.’ 라고 지시만 하면 다 이루어지는 도시였고, 첨단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깨끗하고 편리하고 무엇이나 이루어지는 이런 세상을 과학자들은 지상낙원이라고 불렀습니다.

 

빙청 선인 일행이 도시로 들어서자 인공지능 로봇 하나가 환대하면서 시내의 주요 명소들을 안내해주었습니다. 다성과 일행들이 인사하고 말을 건네자 인공지능 로봇은 마치 사람처럼 인사하고 대답했습니다. 빙청 선인의 제자1이 자신들은 불교학술세미나가 열리는 시립도서관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말했더니 인공지능 로봇이 직접 그들을 데려다주었습니다. 빙청 선인 일행이 시립도서관에 도착하여 학술세미나실로 들어서자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주최측에서 소책자를 나누어주었는데, 오늘 발표할 주제는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이었습니다.

 

다성은 경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분석 경(S12:2)에 무명에 대한 정의가 나왔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무명(無明)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무지이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명이라 한다.” 다성은 이 가르침을 여러 번 읽고 나서 잠시 눈을 감고 그 뜻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사회자가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 무명에 대해 간단한 예비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십이연기에서 보면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이 발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무명(無明)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무명의 어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무명의 어원은 : 얻어야 될 것을 얻지 못하게 하고,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을 얻도록 하는 것. , 몸과 말과 마음으로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을 얻도록 하는 것이고, 몸과 말과 마음이 얻어야 할 좋은 것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이란 모르는 것이고, (모르면 잘못 알게 되는데)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은 온계에 대해 모르게 하고, 잘못 알게 하여 중생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로 치달리게 됩니다. •••

 

다성은 무명의 뜻이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아는 것이라고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무엇을 모르는 것인가요? 다성은 조금 전에 읽은 사성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고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치달리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풀과 나무 경(S15:1)) 는 가르침도 기억했습니다.

 

이윽고 발표자1이 인사를 하고 발표했습니다. “무명은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아는 것이라고 앞 발표자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럼, 이것을 경문에 맞게 적용해보겠습니다. 고성제를 모르는 것(괴로움을 괴로움인 줄 모르고 괴로움을 행복 등으로 잘못 아는 것)이 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런 고성제는 책 속에나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 가득합니다. 세상 어디에나 고성제가 있습니다.

 

눈이 보는 것도 고성제이고, 보이는 것도 고성제이고, 보아서 아는 것도 고성제입니다. 귀가 듣는 것도 고성제이고, 귀에 들리는 것도 고성제이고, 들어서 아는 것도 고성제입니다. 코가 냄새 맡는 것도 고성제이고, 냄새 맡아지는 것도 고성제이고, 냄새 맡아서 아는 것도 고성제입니다. 혀가 맛보는 것도 고성제이고, 혀에 맛보아지는 것도 고성제이고, 맛보아서 아는 것도 고성제입니다. 몸이 닿는 것도 고성제이고, 몸에 닿는 것도 고성제이고, 몸에 닿아서 아는 것도 고성제입니다. 마음()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상상하는 것도 고성제이고, 마음에 의해 생각되어지고 계획되어지고 상상되어져서 아는 것도 고성제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한 것들은 모두 고성제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좋아하고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도록 행하고 만들어내는, 이 모든 것도 고성제입니다. , 이런 것은 모두 괴로움이고 고통입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 말이 와 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명 때문입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무명 때문에 오히려 형성된 것들을 즐거워합니다.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 맡고 혀가 맛보고 몸이 감촉하고 마음()이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봅니다. 행복을 주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생멸하기 때문에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들은 고통을 줍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변하고 바뀌기 마련이므로 의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범부는 형성된 것들에서 무상한 성품을 보지 못하니까. 조건 지어진 것들은 무상하고 고통을 주는 것인 줄을 모릅니다. 괴로운 것을 괴로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을 좋은 것이라고 즐거운 것이라고 봅니다. 바로 무명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명이 있으면 괴로움을 괴로움인 줄 모르고, 괴로움을 오히려 즐거움이라고 좋은 것이라고 행복이라고 잘못 알게 됩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무명에 덮여 있기 때문에 무명이 부서지기 전까지는, 그냥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대로 잘못 압니다. 그래서 보거나 듣거나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지혜가 발휘되지 않고 무명이 앞질러 가버립니다. 그래서 법의 특성을 보지 못하고, ‘남자다, 여자다, 내가 한다, 내가 걷는다, 아름답다, 멋지다.’ 등으로 모든 법들을 항상하는 자아를 가진 존재로 봅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한번도 정신물질의 특성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고통을 고통으로 바로 알기 위해서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정신물질 현상을 주시해야 합니다. 정신물질 현상을 주시하는 그 순간에는 법의 특성을 보기 때문에 무명이 순간 벗겨집니다. 예를 들어, 알아야 할 것을 알고 보아야할 것을 알게 되면 : 가려울 때 무명에 앞서서 지혜가 작용합니다. 가렵더라도 대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가려움이라는 법의 성품으로 드러나서 사라집니다. ‘팔이 가렵다’, ‘내가 가렵다라는 곳까지 가지 않고 그냥 법의 성품이 가지는 특징만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위빳사나로 법을 알지 못하면 무명이 먼저 일어나 잘못 알게 됩니다. ...”

 

다성은 발표자1분의 설명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그동안 무명이라는 용어를 가끔 들어보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준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무명이란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아는 것이었습니다. 괴로움을 괴로움인 줄 모르고 도리어 그것을 즐거움으로 잘못 아는 것이었습니다. 발표자1분의 설명을 들으니 눈도 괴로움을 주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도 괴로움을 주는 것이고 눈으로 안 것도 괴로움을 주는 것이고 눈의 감각접촉도 괴로움을 주는 것이고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도 괴로움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성은 무명에 덮여서 그것들이 괴로움인지도 몰랐고 도리어 즐거운 것이고 행복을 주는 것이라고 잘못 알아서, 그것들을 구하려고 애쓰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3-1. 집성제를 모름

발표자1의 발표가 다 끝나자 다음으로 발표자2가 단상으로 나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발표자1님께서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냄새 맡을 때마다 맛볼 때마다 닿을 때마다 생각하거나 알 때마다, 육문(六門)에서 나타나는 모든 고통의 법()들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 모름이 무명이고, 그 고통의 법들을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이 잘못 아는 것도 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는 경문에 나타나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무지(無知), 집성제(괴로움의 원인, 갈애)를 모르는 것도 무명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앞선 발표에서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무명이었는데, 이제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무명입니다. 보고듣고냄새 맡고맛보고닿고생각하거나 아는 : 여섯 대상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좋아함이나 즐김을 고통의 원인인 줄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도리어 그것(고통의 원인)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잘못 아는 것도 무명입니다.”

 

다성은 고성제인,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의 낱말 뜻을 알기 위해서 얼른 경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찾아보니,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라고 초전법륜 경(S56:11)에 나왔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갈애를 설하리라. 그것은 그물처럼 [곳곳에] 치달리고 퍼지고 달라붙는다. 이 세상은 이것에 의해서 망가지고 둘러싸이고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며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을 건너지 못한다. ...’고도 나왔습니다(갈애 경(A4:199)). 다성은 경문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다시 발표자분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발표자2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무명이 있으면 고통이 고통인 줄을 모르고, 고통의 법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본 것에 대해 다시 보고 싶어 하고, 들으면 다시 듣고 싶어 하고, 냄새 맡으면 다시 냄새 맡으려 하고, 맛보면 다시 맛보려하고, 닿으면 다시 닿기를 바라고, 생각한 것은 다시 생각하기를 바라고, / 남이 가지고 있으면 자신도 가지기를 바라고, 남이 무엇을 하면 자신도 무엇을 하려하고, 남이 어디를 가면 자신도 어디를 가려하고, 이렇게 계속해서 하려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애쓰는 행(, 형성)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무명과 행을 연결시켜주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갈애 다음에는 집착()이 뒤따릅니다. 무명과 행 사이에는 갈애와 집착이 있습니다. 무명 때문에 모르고 잘못 알아서 고통을 행복으로 알아 즐기려는 갈애가 뒤따르고, 그 다음에는 왜곡된 방식으로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취()하게 됩니다. 취한 대상을 가져야겠다고얻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애쓰면 행(형성)이 발생합니다. ‘무명 사이에는 갈애와 집착()이 있습니다.

 

무명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좋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는 것을 갈애라고 합니다. 이 갈애가 고통을 발생시키고 증장시키는 원인입니다. 그런데 무명이 있으면 이 갈애를 고통의 원인으로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것(갈애) 때문에 행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갈애가 행복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행복으로 잘못 알게 된, 그런 행복이 달콤하다고 보이는 것은 갈애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즐길만한 좋고 즐거운 것이 있다고 보아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 갈애입니다. 그래서 좋고 마음에 들고 만족이 오도록 하고, 좋아하고 즐거운 꺼리가 있도록 계속 구하고 애쓰는 것은 갈애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즐거운 꺼리들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코에 냄새 맡아지는, 혀에 맛보아지는, 몸에 닿는, 마음()으로 생각되어지는 을 구해 다닙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이런 즐거운 꺼리를 구해 다니며 이런 것을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좋아할 꺼리를 즐거워할 꺼리를 구하고, 내가 취할 대상들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다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를 행복의 원인으로 여깁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런 좋아하고 즐거운 꺼리가 세상에 없으면 지루하고 못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갈애가 사라지면 그런 것들이 고통의 원인으로 보입니다. 갈애는 즐겁지 않은 것을 즐거운 것으로 보이도록 만드니까 갈애를 버려 나가는 수행자들은 세상에서 취할 것이 점점 줄어들고 나중에는 세상에서 즐길 만한 것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무명은 : 둘째로는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모르고, 오히려 갈애를 행복의 원인이라고 잘못 아는 것을 말합니다.”

 

두 사람이 발표를 마치자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빙청 선인과 제자들과 칠지는 조용한 곳에서 휴식을 했고, 다성과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다성은 오늘 굉장한 것을 들어서 배웠습니다. 이제야 무명이 조금 이해되는 것 같았습니다. 네 가지를 모르는 것 중에서 지금 다성은 2가지를 들었습니다. 무명은 첫째는 고성제를 모르고 잘못 아는 것이었고, 둘째는 고성제의 원인을 모르고 잘못 아는 것이었습니다. 다성에게 오늘 발표회는 정말로 유익했습니다.

 

한편, 인공지능을 만드는 과학자들이 정신 치료와 심리 치료에 도움을 받기 위해 이 강연회에 많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강연 도중 실시간으로 발표 내용을 인공지능에 입력하였고, 인공지능들은 그 내용을 발판으로 자가 학습을 하여 엄청난 새 정보를 쌓아갔습니다. 과학자들은 삼장과 논서류와 주석서들 뿐만 아니라 초기불교와 사마타/위빳사나를 가르치는 스님들의 모든 법문을 조사하여 입력하였고 인공지능들은 짧은 시간에 그 데이터들을 학습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새 정보를 만들어냈습니다. 인공지능들의 놀라운 학습능력을 보고 과학자들은 이제 인간의 정신병과 감정조절장애 등의 마음병을 모두 치료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2. 멸성제, 도성제를 모름

점심시간이 끝나고 주제 발표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발표자3이 발표했습니다.

무명이란 세 번째로는, 고멸성제를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아는 것입니다. 고통의 소멸이란 갈애의 소멸을 말하는 데, 무명은 이것을 모르는 것이고 갈애의 소멸 말고 다른 것을 고통의 소멸로 잘못 아는 것을 말합니다. 고멸성제가 무엇인 줄 모르고 잘못 알아서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고통의 소멸을 말합니다. 고통의 소멸을 누구는 아뜨만이 범천과 일치되는 범아일여라고 하고, 또 누구는 물질이 없고 정신만 남은 세상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창조주의 나라로 가면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하고, 또 누구는 시간이 지나가면(죽으면) 저절로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 등 세상에는 종교마다 스승마다 다양한 고통의 소멸을 말합니다.”

 

다성은 이 대목에서 !’하고 나지막이 탄성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각자 최고의 경지라고 하면서 서로 다른 것을 말할 때 그 이유를 잘 몰랐는데, 지금 발표를 들어보니 바로 무명 때문이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명 때문에 사람들이 각각 저마다 다르게 최고의 경지를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소멸이 바로 갈애의 소멸이라고 말했습니다. 괴로움이 있고, 그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이니까 괴로움의 소멸은 마땅히 그 원인을 제거하는 갈애의 소멸이었습니다.


다성은 발표자3님의 발표를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다양한 설명들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갈애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말하지, 다른 스승이 설하는 그분들 나름의 최고의 경지를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갈애의 소멸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명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중생들은 갈애의 소멸을 오히려 나쁜 것이라고 하고, 또 때로는 중생의 삶을 끝나게 하고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무명 때문에 갈애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바르게 알지 못하고 도리어 반대로 나쁜 것이라고 중생의 무리를 끝내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무명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성도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불교를 비관적인 종교라고, 삶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보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발표를 들어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갈애를 소멸시켜 괴로움이 없게 해주는 참으로 고마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성은 오히려 불교가 괴로움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보니 불교는 무엇이 괴로움인지를 알려주고,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고통으로 슬퍼하고 근심하고 비탄하고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는 그런 종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발표자4가 발표했습니다.

무명이란 네 번째로는,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모르고 잘못 아는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고성제를 모르고 고집성제를 모르고 고멸성제를 모릅니다. 그래서 고멸도성제도 모릅니다. 이렇게 고멸도성제를 모르고 잘못 아는 것도 무명입니다. 여기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인 고멸도성제는 팔정도를 말합니다. 이 팔정도는 오직 부처님만이 설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나 다른 스승들은 팔정도를 설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셔서 팔정도를 설하실 때 비로소 고멸도성제가 세상에 있게 됩니다. 사성제와 팔정도가 없으면 그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멸도성제를 모르는 무명이 있으면 팔정도를 들어도 기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 다성은 또 하나 듣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수행 방법들이 있는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 하나뿐이라는 것을 오늘 확실히 듣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세속적인 훌륭한 가르침은 세상을 유익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번영하게 하는 좋은 가르침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하려면 세속적인 가르침만으로는 부족하고 팔정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의 좋은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 그 나름으로 스스로도 행복하고 남과도 화합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려면 팔정도라는 고멸도성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다성은 다시 발표자4님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편, 세간의 다른 스승들은 보시와 지계를 설하실 수 있고, 천상을 설하실 수 있고, 세간적인 색계 삼매와 무색계 삼매를 설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계율을 지키고 남에게 보시하고 선행을 쌓고 다른 생명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면서 선업을 쌓고, 나아가 세간적인 삼매를 닦으면 그것이 완전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설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방법은 훌륭합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은 사람들을 천상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해탈 열반에 이르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가르치는 세속적인 훌륭한 삶의 자세외 실천이 바로 늙음과 죽음을 되풀이하는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인 팔정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팔정도는 바로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를 가리킵니다. 팔정도는 오직 부처님만이 설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무명이란 고멸도성제인 팔정도를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사람들은 괴로움을 소멸하고 행복에 이르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수행하지 못하고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누구는 몸을 학대하는 고행을 하기도 하고, 누구는 감각적 욕망을 다 누리면서 출세간에 이르려고 하고, 누구는 창조주에 의지해서 수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방법들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만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바른 도닦음이라고 말합니다. 무명은 이런 팔정도를 모르고 잘못 아는 것을 말합니다.”


마침내 오후에 시작된 발표자 두 사람의 주제 발표가 모두 끝났습니다. 발표자3에 따르면, 무명이란 셋째, 고멸성제를 모르는 것이고 또 고멸성제를 잘못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을 그 원인인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다른 경지(예를 들면 범아일여라든가 범천이라든가 색계 세상이나 무색계 세상 등)를 얻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아는 것도 무명이라고 했습니다. 발표자4는 무명이란 넷째, 고멸도성제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인 팔정도를 모르는 것도 무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명에 덮인 사람은 팔정도 대신에 다른 도닦음을 제시하면서 그것으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했습니다. 발표가 모두 끝나자 청중들은 돌아갔습니다. 다성은 오늘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무명의 뜻을 들은 것이 큰 행운이었습니다. 날이 저물어서 빙청 선인 일행은 그날은 <인공지능 도시>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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