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18-2. 삼빠자나 : 위디뜨와

풀빛 너머 2017. 7. 31. 19:55


▣ 대념처경 -신념처9[자세-가르침의 근본-부정관](부산 수행 170725)

   [동영상] ☞ https://youtu.be/-ZlRdzQsZbc



(41분 28초 ~ 50분 3초)

2. 교본2, 삼빠자나 : 삼빠자나 까리

그런가하면 ‘삼빠자나’도 동일하게 가르침의 근본이라고 말해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나와요. 한 가지는 우리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지금 보는 것으로는 대표적으로는 ‘삼빠자나 까리’라고 말하면 되겠지요. ‘삼빠자나 까리 호띠’ -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행위하는 자이다. 또는 그러한 자가 되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행위 가운데 이 행위가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지속적으로 판단해가면서 행위해야 괴로움을 만들지 않는다, 이런 개념이지요.



2-1. 삼빠자나 : 위디뜨와

그런가하면 또 하나가 ‘위디뜨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자각하면서’, ‘자각한다, 안다, 알면서’ 라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위디뜨와 라는 것은 어떤 말이 이어지는가 하면, (삼빠자나라는 말과 함께 잘 나오는데) 우리가 가끔 그 이야기를 하지요? (즉) 느낌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느낌이든 싫은 느낌이든 느낌들이 일어나면 이 느낌에 치이잖아요. 느낌에 딱 치여서는 좋은 느낌이 오면 ‘와, 좋다’ 라고 하고, 괴로운 느낌이 딱 부딪혀 오면 ‘아, 괴로워.’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지요.


그런데 많은 경전에서는 이 ‘위디뜨와’ 라는 말을 ‘삼빠자나’와 연결해서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수(受) - 내 안에서 어떤 느낌이 경험된다라고 하면 이 느낌이 생겨나서 유지되다가 없어지는 이 과정을 내가 자각한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참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예요(안 되는 것처럼 들려요). 아니, 내가 어떤 상황에서 내 안에서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지, 내 안에서 행복한 느낌이 이렇게 일어나서 이렇게 유지되다가 이렇게 없어진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내가 알면서 내가 직접 보면서 ‘아, 내 안에서 이렇게 행복이 일어나고 있구나, 유지되다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이렇게 무상한 행복에 대해서 내가 뭐 집착할 것인가?’(라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것은 유지되다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이렇게 무상한 괴로움에 대해서 내가 뭐 집착할 것인가? 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법우님, (우리는 아직) 이것이 말처럼 잘 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어떠한 법들에 대해서 생겨나고 유지되다가 없어지는 것, 그것을 ‘내가 직접 본다, 자각한다, 자각하면서 대응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굉장히 강조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설명드리겠지만, (이 부분은) 교리적으로 불교와 불교 아닌 것들, 이 차이를 그어줄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에요.


지금 제가 방금 말했지만 내 안에서 이런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서 유지되다가 없어지는 그것을 내가 직접 본다고 하면 ‘아이고, 내가 지금 행복한 느낌이 좀 느껴졌지만, 이것은 조건들이 결합하니까 이것(행복한 느낌)이 이렇게 생겨났다가 그 조건들이 유지되는 동안 요렇게 좀 남아있다가 조건의 결합이 해소되면∙조건들이 흩어지면 없어지는 (것이라고 알 거예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 느낌은 어떻다고 말하지요? 이런 것을 무상하다고 하지요.


이 느낌이라는 것이 부딪혀오면 그냥 딱 부딪혀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느낌이 (부딪혀올 때) 행복한 느낌이 오면 이 행복함이 지속되는∙계속되는 줄 알고 이것을 붙잡으려 하는 것이 무명이고 탐이 되는 것이잖아요. 그럴 때에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이 느낌이 부딪혀오면 그 느낌에 내가 타격당한 상태에서 대응하니까 그렇게 되는데, 이것은 수행을 통해서 보는 힘이∙지혜가∙사띠가 힘이 있어지면 (달라집니다. 즉) 어떤 느낌이 딱 왔다고 하면 ‘이런 조건에 의해서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이 없어지고 있다.’라고 직접 본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보게 되면 ‘아, 이 조건들의 결합과 해소에 의해서 이렇게 느낌이라는 것이 생겨났다가 유지되는듯하다가 없어지는 이런 것’인데, 여기서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가요? 내가 그것을 붙잡고 ‘이 행복한 느낌아, 계속 좀 지속되어 다오’ 라고 내가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내가 아무리 집착해봐야 조건에 의해 결합된 것들은 이렇게 조건의 변화에 의해서 없어지기 마련인 거거든요. 아무리 내가 그것을 붙잡고 ‘이 행복한 느낌아, 나와 함께 해 다오.’ 라고 해도 자기 스스로 조건에 의해서 없어지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바로 ‘이렇게 조건지어진 것이다, 무상하다는 것’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직접 보는 일을 통해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무상, 사실은 무상이라는 것이 ‘무상고무아’, 이런 존재의 실상이고 여실지견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것을 직접 보는 일을 하게 되면 더 이상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나오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이 나오는) 대표적인 문장으로 보면, ①수(受) 느낌에 대해서 그러하고, ②그 다음에 상(想)(에 대해서 그러합니다). 상(想), 이것이 수를 상의 간섭하에 인식하는 것이 이차인식이잖아요. 그래서 무명이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이때 수도 그렇게 생겨났다가 유지되다가 없어지는 것을 내가 자각하고, 상도 이렇게 간섭해서 무명을 만드는 상의 간섭 과정도 상이 일어났다가 유지되다가 없어지는 것을 직접 자각한다(고 나옵니다). ③그리고 세 번째로 위딱까에 대해서도 위딱까가 생겨나서 유지되다가 없어지는 것을 자각한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대표적인 세 가지에 대해서 이런 표현이 나오거든요. 그렇게 이제 삼빠자나의 두 번째의 의미(위디뜨와, 자각하다)를 이해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경전은 하여간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①사념처라는 이 사띠, ②그리고 삼빠자나에서 삼빠자나 까리 호띠, ③그 다음에 ‘위디뜨와’ 라고 하여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 무상을 자각하는 이것을 두 번째의 삼빠자나라고 해 가지고, 이 ①②③에 대해서 부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 우리들의 교본이다, 가르침의 근본이다.” 이렇게 나타나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