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장구 간단히

중용장구 제2장, 간단히

풀빛 너머 2017. 3. 17. 09:02

이 글속에 오류가 있고 오타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가 잘못 듣고 잘못 필기한 것임을 밝힙니다.


* 제2장은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여기에서 한문 원문과 해석을 복사해 왔습니다.

http://chul2638.tistory.com/3851


2. 仲尼曰 君子 中庸이요 小人 反中庸이니라

중니(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중용이요 소인은 반중용이니라.

(성백효 역주, 대학∙중용장구, 전통문화연구회, 2000 :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대로 한다.”)


(강의 필기 : (중용에도 두 개가 있다. ①‘불편불의’와 ②‘무과불급’. 불편불의는 미발지중의 중이고, 무과불급은 발이개중절의 시중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중용의 마음을 가지고 언제나 중용에 맞도록 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하다록 행동한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대문을,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둘째는 여기 용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본인이 알아야 합니다. cf) 공자왈-노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기록할 때와 일반적으로 칭할 때 씀. 중니왈-친밀하게 부를 때 자를 씀. 자왈-존경하여 부르는 말, 부자-우리 선생님, 공자 당시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부를 때 씀)


(나의 이해 : 덕을 완성한 군자는 세상의 이치를 알아 그 이치에 맞게 행위하고, 덕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이치를 몰라서 그 이치와는 반대되는 쪽으로 행위한다.)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이요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니라

군자의 중용은 군자이면서 때로 중을 하고 소인의 반중용은 소인이면서 꺼림이 없느니라.

(성백효, 2000 : 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로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忌憚)이 없기 때문이다.)


(강의 필기 : 군자가 중용을 실천하는 까닭은 (미발일 때도 기발일 때도 중용을 하는 것은) (내면적으로도) 군자의 덕을 (마음에) 지니고 있으면서 (불편불의), 또 어느 때이고 중용에 처해 있는 것이다. (무과불급) (중용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위치와 행위의 모습이 달라지므로 어느 때고 중용에 맞게 한다.) 소인이 중용을 하는 것은 (소인도 중용을 하고 싶은데 소인이 중용을 하는 것은 겉은 따라하는데) 소인은 소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만 좋으면 되었지 남이 무슨 소용인가?) 꺼리는 것도 없고 어려워하는 것도 없으므로 군자의 중용이 안 되는 것이다. 이 대문은 [反]을 넣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경연에서도 논란거리였다.)


(나의 이해 : 군자가 중용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군자는 덕과 지혜를 완성하여 때에 맞게 말하고 행위한다는 것이고, / 소인이 중용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덕이 없고 지혜가 없어서 스스로 부끄러움도 없고 남보기에도 부끄러움이 없어 몸과 말과 마음∙생각의 나쁜 행위라도 꺼리지 않고 해버린다.)



(강의 필기 - 이영호 선생님의 중용의 이해 강의에서, 참고 : 중용 제1장에서

天命之謂性이요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

하늘이 명(命)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性)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


중용은 주자 당신도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라서 이해가 안 되면 해석만 하고 넘어가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중용에서 말하는 어떤 지점을 깨치고 나서 중용을 보아야만 명료하게 이해된다고 했습니다. 해석은 되는데 내가 마음의 그 지점을 알지 못한다면 실감나게 와 닿지는 않습니다. 제가 그것을 확실하게 안다면 실감나는 언어로 할 수 있을텐데 제가 아직 그렇지를 못해서 ...


중용은 주자가 장구로 나누어놓았는데 33장으로 나누었지요. 제1장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주자학의 근간이 된 내용입니다.


우주에서부터 논의를 해서 인간까지 폭을 좁혔습니다. 설명을 잠깐 드릴게요.

천(우주). 이 우주는 질서가 없고 의지가 없고 황량함 그 자체만이 아니고 거기에는 거대한 ‘무엇?’이 있어요. 이것을 이치, 이(理)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무엇?’은 몰라요. ‘무엇?’을 이름 붙인 ‘이(理)’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주 전체에 편재해 있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 하느님의 역사하심, 은총이 될 수도 있을까요?


‘그것?’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물상(物象)과 동떨어진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물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우주 안의 물상에 그것이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상안에 그 ‘무성?’이 스며드는 작용을 가리켜서 명(命)한다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주에 편재한 거대한 원리는 자신 안의 신성의 한 빛을 우주 안의 모든 물상에 다 나누어주는데 그 작용을 명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특히 인간이 부여받은 우주 안의 원리 혹은 빛의 한 부분을 성(性)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름붙이기 어려운 ‘무엇?’은 활동성을 가지고 우리 내면에 스며들어 와서 이름을 붙인 것이 ‘성(性)’인데. 성안에도 ‘무엇?'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이 우리 몸과 마음의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꺼집어 내어 보여주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움직이고 밥 먹고 걷고 말하는 것이 바로 ‘무엇?'이 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 홍길동이 홍길동이게끔 하는 가장 확고한 증거는 성(性)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를 나이게끔 규정짓는 것이 바로 성이라는 겁니다.


금강경에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에서 나를 가리켜서 주석을 다는 어떤 스님은 불성이라고 했습니다. 거의 유사한 논리입니다.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가장 결정적이고 불변하고 확고한 것은 바로 성, ‘무엇?’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에 홀리지 않아야 합니다. 나를 나이게끔하는 것이 성(性)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산다고 합니다.

...

우리는 나를 나이게끔 하는 지점을 우리는, 삶 속에서 어디에서 찾는가요? 나는 외부의 사물과 부딪치는 데서 생기는 감정의 지검을 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좋고 나쁘고 기분이 변하는 이것을 나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의 근간이고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록 그것이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다가오더라도 (누가 내 손을 바늘로 찌르면 아야!, 배가 고프다, ...), 성은 그것이 잘 안 나타납니다. 그래서 참다운 나를 잘 모른다는 겁니다. 손님으로 들어온 것들이 주인인양 행세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용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고 살아가라고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서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그 삶을 도(道)라고 합니다. 도인은 내가 누구인지,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도인이라고 합니다. 시시각각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도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도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천, 천명, 성, 도는 하나도 안 보여요.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핵심적인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안 보이고 안 들린다고 해요.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기관으로는 그것이 포착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천, 천명, 성, 도를 깨달은 사람들을 유가에서는 성인이라고 합니다. 성인들이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지점에서는 남이 아니고 하나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에는 그렇게 안 되어요.


그래서 성인이 그나마 범인(凡人)이 감각기관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아, 저것이네.’하고 볼 수 있도록, 100%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을 실마리로 하여 그 문에 들어와 보라고 한 것이, 성인이 그나마 범인에게 천, 천명, 성, 도의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으라고 시설해놓은 것이 바로 예(禮)와 악(樂)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과 성이 다 들어가 있는 도(道)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교(敎)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의 내용은 성인이 만든 예와 악이라는 겁니다.


참고로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요순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왜 나는 요순처럼 될 수 없는가? 라고 했어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부처도 사람으로 태어났고 나도 사람인데 왜 나는 깨달을 수 없단 말인가?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표를 성인에 두고, 자꾸 이런 쪽에 눈을 두고, 마음을 두고 유학을 공부해야 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