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빛 너머

만든 이야기 - 어떻게 홀로 앉음을 닦기 시작합니까?

풀빛 너머 2017. 1. 12. 23:35


 

이 글은 그동안 제가 배운 것과 생각한 것을 섞어서 만든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다성은 시민명상교실에 등록했습니다. 거기서 명상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다른 회원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명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성은 명상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햇볕이 따뜻했습니다. 다성은 근처 마을 공원에 갔습니다. 벤치에 앉아 명심보감을 펼치고 마음속으로 성독을 했습니다. 그때 어떤 어린이가 다가와 사탕을 서너 개 주었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 어린이가 다시 와서 옆에 앉았습니다. “조금 전에 엄마가 저기 아저씨한테도 사탕을 좀 갖다드리라고 했어요. 엄마한테 저 아저씨는 한문책을 보고 계시던데 저기 가서 좀 있다고 와도 되요 했는데, 허락하셔서 다시 왔어요.”


그 어린이는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는 중학교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너무 장난을 좋아하고 성급하고 참을성이 없어서 엄마가 서예 학원에도 보내고 바둑 학원에도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서예 선생님과 바둑 선생님께서 명상을 하자면서 자기들에게 5분씩 명상을 시키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저씨께서 한문책을 읽고 계셔서 반가웠다고, 그러면서 다성에게 아저씨도 명상을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성은 말했습니다. “응, 나도 시민명상교실에서 명상을 조금 배웠단다. 그런데 나는 명상을 잘 못한단다.” 어린이가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어떤 명상을 배웠셨어요?” 다성은 ‘홀로 앉음’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린이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고 다성은 기뻐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성이 말했습니다. “응, 그럼, 그동안 내가 배운 것과 생각한 것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말해 볼게. 자, 우리, 자리에 한번 앉아 볼까?” 다성과 어린이는 신발을 벗고 벤치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습니다.

다성이 말했습니다. “자,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보자. (시간이 1분 쯤 흐름) 어떠했니?”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숨소리가 들려요. 배가 불룩불룩 했어요. 숨 쉬면서 배에 주의(注意)가 가기도 하고 숨에 주의가 가기도 하고 들썩이는 몸에 주의가 가기도 했어요.”


다성이 말했습니다. “자, 그럼 계속 해보자꾸나. 이제 숨에 주의를 두자. (1분 쯤 흐름) 어떠했니?”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느껴져요.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있으니까 학원 숙제 걱정이 하나도 안 났어요.”


다성이 말했습니다. “그럼, 이제 이렇게 해보자꾸나. ‘숨을 쉴 때 길게 들이쉬면 길게 들이쉰다고, 짧게 들이쉬면 짧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면서 숨을 쉬어보자. (몇 분이 흐름) 어떠했니?”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었어요. 분명히 알면서 숨을 쉬려고 하다가 보니까 제가 애쓰는 것 같았어요. 숨을 길게 들이쉬려고 제가 애쓰는 것 같았어요. 또 숨을 짧게 들이쉬려고 제가 애쓰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다시 마음을 잡고 해보았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런대로 되었어요. 어떨 때에는 숨이 길게 들이쉬어졌고 어떤 때에는 숨이 짧게 들이쉬어졌어요. 또 어떤 때에는 숨이 길게 내쉬어졌고 어떤 때에는 숨이 짧게 내쉬어졌어요. 지금 마음이 참 편안해요.”


다성이 말했습니다. “바둑으로 치면 이론은 내가 많이 배웠지만 실전은 네가 더 잘 하는구나. 나는 몇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려고 하다가는 그만 다른 생각으로 빠져버리고 만단다. 그래서 나는 호흡을 계속 이어보지 못한단다. 그런데 너는 참 잘 하는구나.” 어린이가 쑥스러운 듯 “아니에요.”하면서 살짝 웃었습니다.


다성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명상을 배웠단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해. 졸음이 온다거나 게으른 마음으로 하면 안 돼. 정신을 차리기는 차리는데 이런 마음가짐으로 정신 차리면 좋단다. 내게 있는 나쁜 것들을 버려야지 하면서. 예를 들면, ‘친구를 미워하지 말자, 친구에게 나쁜 욕을 하지 말자, 부모님이 꾸중하실 때 원망하지 말자.’면서 말이지. 물론 다른 나쁜 것들이 내 마음에 있다면 그것들을 떨쳐버리자면서 정신을 차리면 좋을 것 같애.”

그러자 어린이가 말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자는 말씀이시지요?” 다성이 대답했습니다. “그렇단다. 그럼 이제 이름을 명상이라고 하지 않고 ‘홀로 앉음’이라고 해 볼게. 홀로 앉음은 나쁜 일을 하지 않는 사람, 나쁜 행동을 하지 앓는 사람이 되자, 참된 사람이 되자는 그런 마음이 바탕에 있어야 해. 이렇게 내 몸과 말과 마음의 나쁜 요소들을 모두 없애자는 것을 바탕에 두고 정신 차리면서 분명히 아는 것을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 같고, 빠알리 어로는 사띠(sati)라고도 한다고 해.

어린이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성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성은 돌아왔습니다.



참고로 아래는 제가 얼마 전에 다른 곳에 쓴 글입니다.


홀로 앉음을 닦으려고 할 때,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동안 동영상 법문에서 배운 것과 제가 생각한 것을 섞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생각을 섞었기 때문에 이 글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 글은 **** 에서 복사해 왔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이어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비어있는 처소에 가서 앉는다.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콧구멍 주위를 지향하면서 사띠[염(念)]을 생겨나게 한다.


그는 오직 사띠하면서 들이쉬고, 오직 사띠하면서 내쉰다.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내쉴 때는 ‘짧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자.’라고 시도하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자.’라고 시도한다. ‘신행(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자.’라고 시도하고, ‘신행(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내쉬자.’라고 시도한다. ...

이하 생략.)



저도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사띠를 하면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하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대로 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신념처를 잘 닦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생각해보니 세 군데 쯤에서 저는 잘 못했습니다. 그 세 군데란 어디입니까? ‘자리에 앉음 - 사띠 - 호흡 관찰’, 이렇게 진행될 때 : 저는 ‘자리에 앉음 - (한 곳) - 사띠 - 호흡 관찰 - (한 곳, 또 한 곳)’, 이렇게 세 군데에서 잘 못했습니다. 

 

첫째는 자리에 앉았을 때 사띠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한 군데입니다. (자리에 앉음 - (한 곳) - 사띠 - 호흡 관찰) 자리에 앉았는데 걱정거리나 근심거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사띠가 안 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걱정거리나 근심거리를 잠재우고 사띠를 하여 이제 호흡을 관찰하는데, 마음(意)이 곧 다른 곳으로 가는 경우가 또 한 군데입니다. (자리에 앉음 - 사띠 - 호흡 관찰 - (한 곳)) 걱정과 근심이 잠시 가라앉아서 사띠를 하여 호흡을 한 두 번 관찰하는데 어느새 다른 사유(생각)로 넘어가 있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호흡을 관찰하는 가운데 어떤 앎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빠져 호흡을 놓치는 경우와 ‘안이비설신의 - 색성향미촉법’에서 의(意, 마노)가 떠오르는 법(法, 담마)을 분별하여 알면서 호흡 관찰을 놓치는 경우가 또 다른 한 군데입니다.


호흡 관찰이 잘 안 되는 경우를 다시 말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홀로 앉음을 닦으려고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나 걱정, 근심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홀로 앉음을 못 닦는 경우입니다.


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호흡을 관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관찰하려는데 그만 마음(意)이 다른 데로 가 있습니다. 마치 양치질을 하는데 칫솔이 이에 닿거나 하는 것을 느끼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양치질을 하는 것과 같이, 호흡을 한다고 자리에 앉았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두 번째로 못 닦고 있는 경우입니다.


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띠를 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을 관찰하려고 위딱까를 일으켜서 호흡을 관찰합니다. 호흡을 이어보면서 관찰하려고 하는데(또는 호흡을 이어보면서 관찰하고 있는데) 어떤 앎들이 일어납니다. ‘아, 이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아, 그렇구나.’하고 어떤 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기에 빠져 호흡 관찰을 놓치고 맙니다. 이것이 세 번째 못 닦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못 닦는 경우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무엇이 마음(意)예 딱 떠오릅니다. 마치 우리가 눈으로 무엇을 보게 되듯이 갑자기 의(意, 마노)라는 감각기관에 법(法, 담마)이 나타날 때 그만 그 법에 빠져 호흡 관찰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 가지 못 닦는 경우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제가 배운 것과 생각한 것을 종합하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째 경우는 다른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자애의 마음을 일으켜도 되고, ...

둘째 경우는 빨리 알아차려서 호흡으로 되돌아오거나, 되돌아와서는 ‘호흡을 관찰하자.’라고 자꾸 위딱까를 일으키면서 해결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셋째 경우는 사띠의 힘이 강해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