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빛 너머

지어낸 이야기 5 - 출가자를 연모해서는 안 됩니다.

풀빛 너머 2016. 11. 14. 07:05

몇 해가 흘렀습니다. 다성이 말년휴가를 나왔더니 다성의 어머니가 말해주었습니다. 학무동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권 부자가 천안계 빙청 선인이 거처하는 곳에 새로 절을 하나 지어 법해사(法海寺)라고 이름하여 스님께 보시했고, 한 스님이 오셨는데 자연스럽게 그 스님의 법명이 법해(法海)라 불리어졌고, 빙청 선인과 제자들은 법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아 비구가 되었고, 빙청 선인은 계를 받고 나서 홀로 어디론가 떠나가셨고, 남은 제자들은 법해 스님 곁에서 비구로서 새로 공부중이라고 했습니다. 불이는 제자들 중에서 계율과 수행이 단연 으뜸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다성은 권 부자 댁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권 부자는 다성을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그동안 있었던 일상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영은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어제 자영의 친구가 와서 잠시 머물러있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자영을 보았더니 여전히 학무동의 보배처럼 덕스럽고 지혜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자영의 친구 채은이 곁에 있었는데, 다성은 채은을 학교에서 몇 번 보았습니다. 다성은 채은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 스승에 대한 공경’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비로소 알게 해준 사람이 바로 채은이었습니다. 저 옛날 비빈과 궁녀들이 임금님을 대하듯이 그렇게 부모를 대하고 스승을 대하는 채은이었습니다. 당시 다성은 자영의 친구들이 모두 이렇게 훌륭하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영이 다성에게 채은의 고민거리를 말해주었습니다. 채영이 몇 번 학무동에 다녀갔는데 그때마다 불이 스님을 보았고 그것이 그만 연민의 정으로 싹터서 지금은 그리움으로 몹시 힘들어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내일은 채은을 데리고 천안계에 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다성이 왔으니 자신들과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다음 날 다성은 함께 천안계로 갔습니다. 권 부자가 법해사에 전달해주라고 부탁한 쌀 한 가마니를 지고 법해사에 갔더니 법해 스님이 밖에 나와 있었습니다. 자영은 다성과 채은을 친구라고 소개하고 권 부자가 맡긴 편지를 법해 스님에게 드렸습니다. 권 부자는 편지에서 자영의 친구 채은에 대한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법해 스님은 불이를 비롯한 젊은 스님들이 방 안에서 참선중이라고 했습니다.


법해 스님은 자영, 채은, 다성을 둘러보면서 말했습니다. “경행을 해보았습니까?” 모두 말이 없자 법해 스님이 가장 기초적인 경행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경행은 행선(行禪)이라고도 하는데, 우선 이렇게 따라 해보십시오. 편안하게 하십시오. 한 걸음을 걸어갈 때 오른발이 나가면 오른발이라고 알아차리고, 왼발이 나갈 때는 왼발이라고 알아차리면서 이름 붙여 주십시오. 즉, 한쪽 발을 들어 올리면 ‘들어’라고 이름붙이고(마음속으로) 발을 땅에 놓으면 ‘놓음’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십시오. 이렇게 발을 들면 마음속으로 ‘들어’라고 하고 발을 땅에 놓으면 ‘놓음’ 이라고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함께 경행해 봅시다.”


자영과 채은은 몇 번 발을 움직이더니 이내 안정된 자세로 경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성은 한 발을 들어 올리면서 삐뚤거렸고 발을 내리면서 삐뚤거렸습니다. 5분, 10분이 흘렀는데 자영과 채은은 어느새 마음이 발에 집중되어 마음챙김(알아차림)과 바른 앎(발을 들어 올리고 땅에 닿는 것에 대한 앎)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성은 여전히 몸이 삐뚤삐뚤 했습니다. 자세도 불안했고 발에 집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불이를 비롯한 젊은 스님들이 참선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모두들 마당 한쪽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습니다. 

 

법해 스님이 채은에게 말했습니다. “자영의 친구분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출가수행자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만약 그가 바른 길을 걷는 수행자라면 여인에 대해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

채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법해 스님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자영의 친구분이여, 나는 자영으로부터 그대의 이야기를 몇 번 들었습니다. 그대는 부모를 공경하기를 마치 범천을 모신 듯이 하고, 스승 공경하기를 범천을 모신 듯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리고 그대는 마음씨 또한 착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대를 아는 사람들은 이런 그대를 보배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바른 수행자는 그대를 착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알지만 속가의 여인을 사모하지는 않습니다.”

채은은 말없이 법해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법해 스님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자영의 친구분이여, 여기 불이는 그대의 아름다움과 착함과 훌륭함을 보고서도 ‘주저앉아버리지 않았고 헤매지 않았습니다.’ 여기 불이는 ‘자제했고 청정범행을 지켰고 공부에서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볍해 스님이 계속 말했습니다. “불이는 그대의 아름다움과 착함과 훌륭함을 보고서도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불이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 등의 외딴 처소를 의지했습니다. 그러면서 불이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앉았습니다.”


법해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채은에게 점점 부끄러움이 생겨났습니다. 불이는 자신이 생각하던 그런 세속의 청년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불이와 평생을 함께 하려던 자신의 희망이 한갓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점점 일어났습니다. 그때 갑자기 법해 스님의 말씀이 채은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불이는 세상에 대한 간탐을 제거하여 간탐을 버린 마음으로 머물렀습니다. 간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했습니다. 악의와 성냄을 제거하여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물렀습니다. ...

그러자 채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수행자를 사모한 여인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법해 스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언제까지나 미망에 사로잡혀 불이를 그리워해야 했을 자신의 고통이 이제 그쳐지겠구나라는 데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채은은 자영처럼 지혜로웠습니다. 법해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에게 대한 ‘제부끄러움’이 일어났고, 남들에 대한 ‘남부끄러움’도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제부끄러움과 남부끄러움이 일어나자 채은은 법해 스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채은의 마음이 점점 깨끗해졌고, 그 결과 채은은 불이에 대한 자신의 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채은이 배우자를 맞이하려면 같은 사회에 사는 젊은이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동안 그리움에 압도되어 그만 잊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채은은 이런 바른 사실들을 일깨워준 법해 스님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채은은 불이를 돌아보며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듯 한편으로는 맑아진 마음으로 합장했습니다.


불이도 청정한 마음으로 합장하며 답했습니다. 먼저 자애의 마음으로, 그 다음에는 연민의 마음으로, 또 그 다음에는 더불어 기뻐함의 마음으로, 또 그 다음에는 평온의 마음으로 채은의 앞날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여기서 더불어 기뻐함이란 누가 행복하거나 잘 되거나 좋은 일을 만나면 그것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님의 말씀이 끝나자 다성은 ‘생각을 이기고 가라.’는 말을 새겼고, 자영은 친구 채은의 깊은 근심이 사라져서 기뻐했고, 채은은 이제 슬픔 없이 안온해졌습니다. 세 사람은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