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느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땅이 비옥해서 곡식이 잘 여물고 산과 들에는 과일도 풍부했습니다. 맑고 깨끗한 강이 마을을 돌아 흘렀고, 기후가 온화했습니다. 홍수나 가뭄의 피해가 없었고 식수가 풍부했습니다. 사람들은 선량하고 정이 많았습니다. 이웃끼리 선(善)을 권하고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마을에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했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위로해주었습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제관(祭官)이 아내와 살고 있었습니다. 제관은 마을의 번영을 빌어주고 마을사람들의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관이 제자들을 받아들였는데, 그 중에서 한 제자가 뛰어났습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언어가 단정하고 행실이 밝았습니다. 모두가 그 제자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관의 아내가 그 제자를 몰래 찾아와왔습니다. 여러 번 주저하다가 작정한 듯 말했습니다. “나는 제관의 아내로 사는 것이 괴로워요. 나는 여기를 떠나 다른 여인네들처럼 살고 싶어요. 나와 함께 떠나실래요?” 제자는 이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스승의 아내와 함께 달아다는 일은 꿈에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모(師母)님. 그런 말씀은 제가 감히 감당하기 어렵나이다.”
스승의 아내는 제자를 쏘아보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제관인 남편을 찾아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자가 저를 능멸했어요. 저를 그리워한다면서 함께 도망하자고 했어요.” 이 말을 듣고 제관은 분노와 질투에 사로잡혔습니다. 전후 사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아내의 말만 믿고 제자를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너를 아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그 제자를 파멸시켜야겠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다음 말 아침 일찍 제관이 그 제자를 따로 불렀습니다. “그동안 그대는 참으로 잘 공부해왔다. 그래서 오늘 그대에게 특별히 도(道)를 완성하는 마지막 비법(祕法)을 전수해주겠다. 그대는 깊이 새겨라.” 하면서 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노루 한 마리를 죽여 그 피를 마시면 도사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비법을 전수받은 제자가 스승의 명(命)을 따르지 않으면 제자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벌이 내린다고 했습니다. 제자는 그 비법이란 것이 아주 이상하게 들렸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훌륭한 도사라면 당연히 생명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데, 죄 없는 노루를 죽여서 자신이 도사가 된다니 참 이상했습니다. 또 스승의 이 비법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가 떨어져 죽는다고 하니 아주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서 제자는 절을 올리고 노루 피를 구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산속은 어둡고 가시덤불로 덮여 있었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랐습니다. 조금씩 숲속으로 들어가자 이상한 짐승들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노루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얼마쯤 숲속을 헤매었더니 목이 말랐습니다. 큰 나무 아래에서 샘을 발견하고 제자는 샘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더니 정신이 가물가물해졌습니다. 옆을 보니 시퍼런 칼이 놓여 있었습니다. 제자가 그 칼을 집어 들었더니 눈앞에 번쩍 하더니 노루가 열 마리나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는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현기증이 점점 심해지고 곧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단걸음에 달려가 노루를 죽이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노루들이 도망가기 전에 빨리 이 칼로 죽여야 된다는 흉악한 생각들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제자는 고개를 절래 흔들며 치를 떨었습니다. 이 죄 없는 노루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선심(善心)이 마지막으로 한번 일어났습니다. 제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일 지 두려워졌습니다. 제자는 있는 힘을 다해 나무 덩굴을 뗐습니다. 덩굴로 자기 발을 나무에 묶었습니다. 손도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짐승들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습니다. 제자가 정신을 차려 보니 밤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빛들이 주위에 드문드문 반짝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짐승들이 경계하면서 제자를 보고 있는 눈빛들이었습니다. 제자는 얼른 입으로 손을 묶은 덩굴을 풀었습니다. 빠르게 손으로 발도 풀었습니다. 짐승들은 미동하지 않고 제자가 하는 모양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에게 달려들어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는 어제 오늘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습니다. 사모님의 이상한 행동, 스승님의 이상한 비법(祕法), 노루 피를 마셔 도사가 되는 것과 거역하면 머리가 떨어진다는 저주, 그리고 여기 이상한 샘물. 하루 이틀 사이에 도대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동이 트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짐승들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나무 옆에 샘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음식을 얻으려고 숲을 빠져나오니 나무꾼이 떡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원기를 회복한 제자는 잠시 자리에 앉아 기도를 했습니다.
여행객이 지나가다가 제자를 보고 물었습니다. 마을 제관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제자는 자신의 스승님은 마을 뒷산에 살고 계시는데, 지금 자신은 스승의 명을 따르는 중이라서 동행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여행객이,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도 비밀스럽게 전수해오는 그런 비법이 있는가? 하면서 제자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비법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가 떨어지는 저주를 당한다며 그런 말씀은 마시라고 했습니다.
여행객은 제자가 딱해보였습니다. 그래서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제자에게 주고는 떠났습니다. 제자가 책을 펼쳐보니 바로 그 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는 분노와 질투에 빠져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는 머리도 알지 못하고, 머리를 떨어뜨리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숫~ p.467에서 인용 및 변형) 제자는 갑자기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이 잠시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솔개가 나타나 책을 낚아채 가고 말았습니다.
그때 빙청 선인 일행이 들판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하늘을 보면서 달려갔고 공중에는 솔개가 입에 무엇을 물고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어찌나 빨리 달렸는지 이내 눈길에서 사라졌습니다. 빙청 선인 일행이 제관과 그 제자가 살던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물이 맑고 깨끗했습니다. 자연 환경도 아름다웠고, 곡식이며 과실이며 채소도 풍부했습니다. 사람들 인심도 후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말 못할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관과 그의 제자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고, 마을사람들은 제자가 노루 피를 마시지 않아서 곧 머리가 떨어져 죽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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