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8-2. 수행이란 무엇을 하는 걸까?

풀빛 너머 2017. 5. 9. 06:10


▣ 대념처경 준비과정3[불교수행 무엇을 하는 것일까](부산 수행 170502)

   [동영상] https://youtu.be/YjX1W9QE0DA


수행한다는 것,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9분 55초 ~ 15분 19초)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어떤 일이 더 필요할까요? 눈이 ‘얼마나 밝으냐?’ 라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보는 일 자체는, 사띠가 (호흡이라는) 대상을 이어보는 일로 (호흡을) 붙잡아줌으로써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했다면, 이제 ‘무상∙고∙무아∙부정’이라는 존재의 실상으로 빛을 비추어주는 것이 있어야 보는 것이 (완전해)지요.


그래서 사띠(눈뜬다)와 빤냐(얼마나 밝게 보는가)라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을 하는 것이 수행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삼매로 가는 것이지요.

자, 이럴 때 ‘수행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봐.’ 하는 일을 일차인식이라는 자리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일차인식이 내입처와 외입처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예를 들어 ‘신념처를 하자(호흡을 붙잡자)’는 것은 신(身)과 촉(觸)의 관계입니다. 이 신과 촉의 관계에서 (칠판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말로 하자면) 의(意)가 신근(身根)을 도와서, 아니면 의가 신근과 함께 공기가 남기는 느낌(촉)을 주목해서 받아들이는 일이 일차인식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잘 안되고 계속 놓치니까 사띠가 마노라는 마음을 보고, ‘마노야, 호흡한테 눈뜨라.’라고 합니다. 마노라는 이 마음이 딴짓할 때마다 발견해서 ‘호흡한테 눈 뜨고 있어야 해.’ 하고 붙잡아놓는 일이 사띠가 하는 일이고, 그것이 유지가 되면 삼매가 되는 거지요.

이 자리에서 신(身)과 촉(觸)이라는 이 두 가지의 대응이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호흡에 눈뜨는 것이고, 이것이 사띠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잘 보아야 합니다. 붙잡고 있는 것과 잘 보는 것은 같은 것일까요? 잘 붙잡고 있다는 것이 잘 보는 것일까요? 붙잡고 있으면 삼매는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려는 것이 삼매 중에서 바른 삼매이고, 이 바른 삼매위에서 깨달음으로 가자는 것이지요. 그럼 이 바른 삼매와 깨달음을 말할 때에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신과 촉이 눈을 떴어, 호흡을 붙잡고 있어.’라고 해도 여기에 문제 상황이 있습니다. ①일단 선행하는 누적된 삶에 집착이라는 오취온의 상태로 지금 삶이 연결되고 있고, ②어쨌든 이 상황이 호흡을 붙잡고는 있는데, 붙잡은 상태에서 작의(作意)하는 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비여리작의로 진행됩니다.호흡을 붙잡고 있는 이것이 상락아정이 아닐까 하면서 비여리작의라는 문제상황을 가지고 있습니다. ③그런가하면 촉이라고 하는 이것도 촉상(蜀相)이라고 하는 왜곡된 상태로 붙잡혀 있습니다.


일단 눈을 뜨야 하니까 (호흡이라는 대상을) ‘붙잡았다’ 하는 이 상황을 놓고 보니까, 보는 자도 오해 가운데 보고(비여리작의 상태이고), 보이는 대상도 니밋따(相)라고 하는 왜곡된 상태로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제대로 보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수행이라는 개념은 다른 종교에서 ‘삼매를 가자.’ 라고 하여 삼매로만 끝까지 가는 이런 경우하고, 부처님이 제시하는 수행은 다릅니다.


부처님 수행은 어쟀든 바른 삼매라는 토대를 만들어서, 거기서 해탈된 삶의 실현으로, 깨달음으로 가야 하니까, 비여리작의라는 오해위에서 잘못 보는, 내가 왜곡된 것을 보는 이 상태에서는 (호흡이라는 대상을) 붙잡고 있는 일만 가지고는(눈을 뜨고 있다는 이것만 가지고는) (깨달음으로) 못갑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밝게 보아야 합니다. 이 밝게 보는 일을 같이 해야 수행이 됩니다.



(15분 20초 ~ 20분 9초)

법우님, 이 ‘밝게 보자’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을 하기에 앞서 먼저 일단 ‘호흡을 붙잡자, 눈을 뜨자’ 라고 하는 것은 하여간 호흡 수행의 앞에서 알려주는 대로, 지향해서 사띠를 생겨나게 해서 사띠하면서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그렇게 해서 눈을 뜨고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밝게 보자’이지요.


‘밝게 보자, 밝은 빛을 비추어주자’는 것은 보는 나도 오해 상태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눈으로 보고, 보이는 대상도 왜곡된 상태에서 벗어나 제대로 보이는, 이런 상황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요?


법우님 : 삼매를 심화시키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해피스님 : 삼매를 심화시키는 것은 필요한 과정이지만 지금 여기서 묻는 질문의 답은 아닌 것 같아요.


어쨌든 (칠판의) 이 그림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먼저 신(身)과 촉(觸)으로 (호흡이라는 대상을) 붙잡자고 하는 것은, 내가 호흡수행을 하는 것이니까 호흡을 붙잡는 것에는 아무 이견이 없습니다. 일단 이것을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경전도 첫 번째로 제시하는 것이 방해받지 않는 장소에서 - 호흡을 지향해서 사띠를 준비해서, 사띠하면서 들이쉬고 내쉬어라 해가지고 호흡을 잡아라고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수행의 입장에서 해야 되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나를 비여리작의하게 만드는 또는 대상을 니밋따(相)로 왜곡하게 하는 그놈, 그놈이 빤냐라는 빛을 배제하고 어두운 상황을 만듭니다.


지금 일차인식이라는 이 상황에서 구체적으로는 누가 그 일(비여리작의하게 하는 일)을 하나요? 욕탐(무명의 요소)이 그것을 하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욕탐은 무엇인가요? ①오온을 오취온으로 만드는 것도 욕탐이 붙잡는 것이고, ②내입처를 비여리작의하게 만드는 것도 욕탐이 붙잡은 것이고, ③외입처를 니밋따로 만드는 것도 욕탐이 붙잡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이 밝음의 상태가 있는데, 이 밝음을 만드는 데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욕탐입니다. 욕탐은 삼중으로 삶의 향상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수행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호흡에 눈을 뜨자.” 그리고 둘째로 “밝음을 향상하자”입니다. 두 번째 밝음을 향상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욕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리 말하면 일단 수행에서 해야 되는 두 가지 일이 무엇인가요? ‘호흡을 붙잡자’와 ‘욕탐을 제거하자’입니다.


여기서 욕탐이 무명의 요소로 불리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욕탐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면, 한 순간 이전의 삶의 과정에서 저 밑의 딱까의 번뇌로부터 시작해서 무명이 갈애가 되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욕탐을 제거하자는 이 일이 어떻게 실현되어 어디에서 완성됩니까? 하면 욕탐은 의업이 신업 구업으로 진행되는 그 중간에서 빠져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욕탐을 제어하려는 일은 어디에서 하는가 하면 일단은 의업을 제어해야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의업을 제어하려면 신업, 구업도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완성까지 가려면 어떻게 합니까? (칠판에서) 죽 내려와서 딱까안에 가서 번뇌를 부수어서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나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욕탐의 제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마지막까지 가서 사마타-위빳사나로 번뇌를 부수는 거기까지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쨌든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일차인식의 자리에서 접근해볼 때, “호흡에 눈뜨자”, 그리고 “욕탐을 제거함으로써 밝은 빛을 비추자.”, 이 두 가지입니다. 


 

(20분 10초 ~ 20분 49초)

법우님 : 욕탐의 제거와 탐진치의 제거는 다른 것인가요?


해피스님 ; 욕탐을 제거하려면 욕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해요. 욕탐은 찬다에 탐이 실려 오는 것이지요. 이 탐이라는 것이 (탐과 진을 함께 말하여) 낙(樂)이냐 고(苦)이냐 하는 대상의 문제이고, 탐과 진의 밑에 무명이 있습니다. 무명은 번뇌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명과 번뇌를 합하여 치라고 말하여, 탐은 탐진치의 포괄적인 표현이지요.


(고요2의 생각 : 제가 두 분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욕탐은 찬다에 탐이 실려 오는 것이고, 탐진치는 번뇌-무명-탐(진)을 말하는 것이므로,

* 욕탐의 제어는 - 일차인식에서 무명의 요소로 참여하는 욕탐을, 일차인식의 자리에서 잘 사띠하여 제어할 수 있고,

* 탐진치의 소멸은 - 딱까라는 내면의 방안까지 들어가서 사마타-위빳사나 수행으로 소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