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념처경 준비과정3[불교수행 무엇을 하는 것일까](부산 수행 170502)
[동영상] ☞ https://youtu.be/YjX1W9QE0DA
수행한다는 것,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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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 4분 42초)
수행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간략하게 좀 짚어봤으면 합니다. 수행, 참 어려운 주제일 것 같습니다. 일단 그림을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안이비설신의 육내입처가 색성향미촉법 육외입처를 주목해서 분별하는 것이 인식(즉, 감각작용)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식이 외입처에 대한 앎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앎이 아니라, 앎을 몸통으로 하는 새로운 마음이 만들어져서 새끼쳐진 식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에 이런 인식작용이 육내입처와 육외입처간의 일대일의 관계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명의 요소’라고 표현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찬다라가(욕탐)’가 인식작용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외입처 각각이 색상 내지 법상이라는 니밋따(相) 라는 상태로 왜곡이 됩니다.
물론 욕탐은 외입처에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입처가 외입처를 주목해서 받아들이는 일을 작의라고 합니다. 이때 욕탐이 내입처도 붙잡아 버려서 작의를 하는데, 있는 그대로를 작의하지 못하고 비여리작의를 합니다. ‘무상∙고∙무아∙부정’이라는 존재의 실상에 의지한 상태로 대상을 주목하지 못하고 거기에 ‘상락아정’이라는 오해를 실어서 오니까, 대상도 왜곡되었고 보는 자도 오염되어 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앞에 무엇이 있나요? 식(識)과 명색(名色)이라고 하는 누적된 삶으로의 내가 있는데, 역시 욕탐이 작용하여 이것을 오취온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족쇄에 묶이는 법을 오온이라고 하고, 오온이 묶여서 오취온이 되고, 육내입처는 묶여서 비여리작의를 하고, 육외입처는 묶여서 니밋따(相)가 됩니다. 그리고 그 묶이는 법들을 묶는 족쇄가 무엇인가 하니 바로 욕탐입니다. 이렇게 경전이 정의를 해줍니다.
수행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 수행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요? 라고 생각해보면 저는 두 단계로 말하고 싶습니다.
일단 수행은 첫째로 누구라는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조금 전에 법우님께서 ‘사념처 수행이 정말로 부처님 수행의 큰 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사념처 수행은 신수심법이라는 대상별로 사띠하는 것을, 이어보며 머무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4분 43초 ~ 9분 54초)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지난 주에 본 것으로써 눈이 있는데 이 눈을 일단 떠야 봅니다. 그리고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띠가 눈을 뜨게 하는 것이고, 빛을 비추는 것은 빤냐입니다. 이때 아무리 눈을 뜨고 빛을 비춘다고 해도 눈이 흔들리면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는데서 사마디(삼매)가 함께 동원됩니다. ‘사띠, 사마디, 빤냐’라는 기능입니다.
자, “수행을 하자.” 라고 하면 어쨌든 필요로 하는 것이 ‘사띠, 사마디, 빤냐’라는 세 가지 기능입니다. 이것을 위해 ‘정진’이 필요하고, 제대로 정진하려니까 ‘믿음’이 필요하여 다섯 가지 기능이 설명됩니다.
그럼, 이제 누구를 붙잡고 수행해야 할까요? 누구라는 대상과 관련하여, 누구를 대상으로 하여 수행할까 하는 것은 ‘사띠와 사마디와 빤냐’ 중에서 누구의 역할일까요? 제가 질문들 드렸는데 질문이 좀 애매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누구를 ‘무엇’이라고 해볼까요?
호흡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호흡을 잡자’라는 이것은, 호흡을 잡아야하는 이 이야기는, 사띠의 몫인가요? 삼매의 몫인가요? 예, 사띠의 몫입니다. 사띠가 호흡을 딱 붙잡아두는 그 일을 해야 그 일이 진행되면서 떠나지 않는다는 데서 삼매가 뒤따라옵니다. 이때 사띠는 눈 뜨는 일을 합니다(눈뜸, 눈 띄움). 이때 눈 뜨는 것이 대상을 잡는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무슨 이야기인가요?
해피스님이 A법우님을 보았다면 A법우님이 대상입니다. 그런데 한 순간 B법우님을 보았다면 대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이때 나는 지금 누구한테 눈을 뜨고 있는 것일까요? A법우님으로부터 눈이 돌아갔으니까 B법우님에게 눈을 뜬 것이지요. 이것은 B법우님에게 눈을 떴기 때문에 A법우님에게는 눈을 감은 셈입니다. 자, 사띠가 눈을 뜬 것이란 무슨 뜻인가요?
신수심법, 호흡을 보자라고 하면, 내 마음이 지금 호흡을 붙잡고 있으면 호흡을 보는 거지요. 사띠가 눈을 띄워주자는 말은, 호흡을 붙잡고 있는 상태가 유지되면 이것이 호흡이라는 대상에 눈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잠깐 깜박하여 다른 데에 갔다 왔다면, 즉 호흡을 놓쳐 딴 생각을 했다면 어떤가요? 딴 생각하는 이 사이는 딴 생각하는 일을 마음이 했지만 어쨌든 호흡을 붙잡고 수행하자는 이 상황, 호흡이라는 주 대상에게는 눈을 감고 마음이 딴데 간 것입니다.
‘사띠하자’라는 말의 의미는, 즉 눈을 띄우자는 의미는 마음이 호흡을 놓치고 딴 데 가는 것은 호흡에 눈 감은 것이라서, 호흡한테 지속적으로 눈을 뜨고 있게 하려면 마음이 딴 데 가려고 할 때 얼른 발견해서 ‘가지 마, 계속해서 호흡을 붙들고 있어.’ 라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띠가 눈을 뜨게 해서 보는 일을 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면 눈이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삼매입니다. 이렇게 수행에서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 “호흡에 눈뜬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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