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5-2, 심(心)의 형성 / 염오

풀빛 너머 2017. 4. 10. 18:37


▣ (S47-49~50)[인식의 단계적 향상(지혜) ㅡ 바른 지혜-실다운 지혜-완전한 지혜](부산 수행 170404)
   [동영상] https://youtu.be/uYEz0cIqCUg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1분 20초 ~ 26분 22초)

자, 이것을 놓고 우리가 한 가지를 좀 보도록 하지요. 자, 딱까라고 하는 내면의 방이 있어요. 그리고 이 내면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에 의해서 갈애가 만들어져요. 그래서 딱까를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였는가 하면 갈애의 형성 과정이다, 나의 내면에서 갈애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지요.


자, 이 딱까라는 것은 어떤 과정이 있나요? 일차인식에서 식이 생겨가지고, 삼사화합촉해서, 여기서 생기는 수, 이것을 놓고 식이 인식주관이 되어가지고 이차인식을 하죠. 이때 대상은 수죠. 낙고불고불락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내적인 경향성인 상(想)이 여기에 참여를 하죠. 그리고 이 상은 병들어있기도 하고 치유될 수도 있고, 상이 병들면 번뇌라고 우리가 알죠. 그러면 중생의 삶은 병든 상(번뇌)이 이차인식에 참여해서 식과 함께 수를 분별하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서 중생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요? 무명이 생겨나고 탐이거나 진이 생겨나지요.


그러면 식은 일차인식에 대한 외입처에 대한 앎이지요. 그리고 무명에 탐과 진이라는 것은 이차인식의 결과로 생겨나는 수에 대한 앎이지요. 그래서 일차인식과 이차인식을 합해서 총괄적인 인식의 결과를 앎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을 심(心)이라고 부르지요.


이때 이 심을 이렇게 보면 되지요. 일차인식에서 생겨난 외입처에 대한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인 식이, 상과 수의 과정, 즉 이차인식을 거쳐가지고 탐을 만들어서 일차인식의 결과인 외입처에 대한 앎이라는 몸통이 이차인식의 결과로 생겨난 탐이라는 몸통을 만들어서 몸집을 부풀렸어. 이렇게 말하는 이것이 앎이죠. 외입처의 앎 + 수의 앎, 그리고 외입처에 대한 앎이면서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마음이라는 것이 식이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식이 몸집을 부풀렸다고 하니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 이것을 심(心)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이 심(心)이 어떤 일을 해요?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라는 자기 내적인 활동을 하지요. 내적인 행위(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는 이 내적 행위)의 결과로 무엇이 생기나요? 난디가 생기지요. 즐김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지요 이 난디에 대해서 그간 불교계가 크게 주목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나 경전은 분명하게 ‘난디라가사하가따’, ‘난디와 라가가 함께 하는 것이 갈애다.’, 이렇게 정의해주고 있지요. 그래서 이차인식의 결과로 생겨난 탐에 의해서 몸집이 부풀려진 마음(심心, 찟따)이 자기 내적인 행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는 과정을 거쳐서 난디를 만들고, 탐과 난디가 함께 하는 상태를 갈애라고 한다 라고 경전이 정의를 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딱까라는 이 내면의 방은 이런 과정을 거쳐 갈애를 형성하는 과정입니다. 갈애는 고집멸도 사성제가 말하는 고집성제이지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라고 말하면, 고집성제가 갈애이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갈애라고 하는 것은 갈애가 형성하는 이 과정을 포괄해서 말하는 거지요. 자, 이런 상태를 딱가라는 내면의 방을 말하는데, 뭐 이러고 나면 이 갈애가 행위를 하죠. 행위 과정이 죽 이어지죠.



(27분 23초 ~ 30분 59초)

자, 이 상태에서 우리가 최근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수행이라는 것이, 수행은 결국 그 완성은 갈애를 부수자, 갈애를 부수면 탐을 부수고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나는, 이런 해탈 상태, 삶을 완성하자, 이것이 수행이지요. 딱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 갈애를 부수자, 갈애를 부수려면 난디가 없어야 한다, 탐을 부수자, 무명을 부수자, 번뇌를 부수어야 한다. 이런 과정으로 딱까 내면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제어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마지막 과정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늘 말하는 겉옷을 벗지 않고는 속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갈애가 행위하는 영역은 그 이전에 먼저 제어해야 하지요. 행위가 제어되는 이 자리를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삼매라고 하지요. 위딱까, 위짜라가 있는 삼매가 초선이지요. 그것(초선)이 갈애의 행위 영역의 출발 자리가 제어된 것이지요. 그리고 위딱까, 위짜라가 없는 제이선 이후의 삼매도 있죠.


이런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삼매라는 것은, 우리가 딱까라는 내면의 방의 결과를 가지고 행위를 하는데, 그 행위하는 영역을 제어하는 것이 삼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하는 이야기가 ‘삼매는 완성이 아니야, 삼매는 삶을 완성하기 위한 토대가 되는 것이야’ 라고 말하지요. 삼매라는 토대 위(바른 삼매)에서 법이 드러나고, 법이 드러마면 드러나는 법에 대한 관찰(법의 위빳사나)을 통해 어디를 가나요? 여실지견에 가지요.


그 여실지견은 무엇인가요? (오늘 우리가 자세히 볼 것은 아니지요.) 여실지견이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무엇인가 하면 내면의 방에 문을 여는 것이다, 우리 이렇게 이해하고 있죠. 딱까라는 방에 문을 열고 어쨌든 방안으로 들어가야 방안을 청소할 수 있지요. 방 밖에서 아무리 걸레질을 해봐도 방안의 오염을 청소 못하지요. 그래서 방문을 여는 것이 여실지견입니다.


그러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하면 해야 할 일이 몇 개가 있어요. 첫째는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는 이 찟따의 내적 활동 때문에 난디가 생겨나요. 그러면 난디가 생겼다라는 것 때문에 딱까의 결과물인 갈애가 되어 버려요. 어쨌든 갈애는 괴로움의 원인이거든요. 그래서 첫째로 급한 일은 갈애가 아닌 상태로 만들어 주어야 해요. 달리 말하면 난디(즐김)와 라가(탐)가 함께 해야 갈애인데, 우선 급한 대로 난디를 없애자는 것이죠. 난디가 없으면 갈애 상태가 아닌 거예요.



(31분 ~ 35분 19초)

자, 난디라는 것은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거든요. 난디를 없애려면 무슨 일이 필요해요?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으면 난디가 생겨나지 않아요. 당연하지요. 그것 때문에 생기는 것은 그것을 안 하면 생기지 않지요. 그래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염오”라고 불러요. 이 염오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여실지견을 통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지요.


자, 그 상태에서 이제 염오해서 난디가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면 (칠판에서) 여기까지 온 거지요. 요 상태가 사실은 또 우리 삶에서 아주 비중이 있는 자리에요. 자, (칠판에서) 요 선 위쪽은 밖에서 행위하느냐 안에서 행위하느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행위영역이지요. (즉, 칠판에서 선 위쪽은) 찟따라는 이 마음이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라는 내적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갈애를 만들어 가지고 위딱까 이후의 외적인 행위를 합니다.


삼매를 통해서 여실지견까지 오는 과정에서 갈애 이후의 외적인 행위는 단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실지견 이후로 딱까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 첫 번째 하는 일이 염오해서 찟따의 내적 행위를 제어하는 것이었지요. 여기까지를 딱 오면 이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제어가 된 거예요. 자, 이 찟따 이후는 행위의 영역이에요. 이 행위의 영역이 제어가 된 거예요. (여기까지가 칠판에서 선 위쪽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칠판에서) 이 아래 단계는 무엇인가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거지요.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하는 식(識)이라는 마음이, 상과 수의 과정(즉 이차인식)을 통해서 탐을 만들어서 몸집을 부풀리면 앎이 되고, 앎을 몸통으로 하는 심(心, 찟따)이라는 마음이 되지요. 그래서 (칠판에서) 노란 줄 밑의 영역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은 찟따(心, 마음)의 형성과정이에요.


이차인식(상과 수의 과정)을 거쳐서 탐을 만들어서 어떤 일을 했는가하면, 찟따라는 이 마음을 만든 거잖아요. 몸집을 부풀려서 찟따를 만든 거예요. 그래서 (만약 갈애가 만들어졌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갈애를 없애야 하므로) 여실지견에 의해서 딱까라는 내면의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들어와서는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는다는 염오의 과정을 거쳐서 난디를 생겨나지 않게 해서 일단 먼저 갈애를 제거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상태가 무엇인가 하니, ‘아, 어쩼든 찟따(라고 하는 이 행위의 주체, 삶의 주체가 되는 이 마음)가 행위하는 영역(내적인 행위든 외적인 행위든 행위 영역)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는 다 해소가 되었구나.’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오직 찟따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번뇌 때문에 생겨나는 요런 형성 과정의 문제만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나요? 존재에 내재한 문제라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칠판에서) 염오에 의해서 그어지는 이 노란색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무지하게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경전은 요 자리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여기가 ‘사띠아야따나’라고 해서 ‘사띠토대’라는 말을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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