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4-3. 폭류, 흐름

풀빛 너머 2017. 4. 5. 09:25


▣ (S47-43)[견해-흐름-폭류-속박](부산 수행 170328)

   [동영상] https://youtu.be/ZVt4lyPAZbw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36분 15초 ~ 39분 4초)

이 그림을 보겠습니다. 딱까라는 것을 중심에 놓고 보면 상이 병들어서 번뇌입니다. 그래서 무명이 생겨나잖아요. 그래서 무명을 십이연기의 첫 번째 지분으로 했지요. 그리고 무명은 번뇌를 조건으로 한다고 해요.

그럼 이제 이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식과 상이 참여를 했지요. ‘식과 수와 상’, 이 세 가지가 참여해서 이차인식을 하면 그 결과로 첫 번째 생겨나는 것(성과물)이 무명이지요. 그 위에 이차적으로 탐이거나 진이 생겨나지요

그런가 하면 이것(이차인식의 결과물들)이 내면의 과정을 거쳐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어때요? (위딱까도 있고 견해도 있지요.) 위딱까라는 것은 지금 어떤 것과 함께 살아가느냐 하는 지금의 구체적인 행위이고, 오늘 우리가 정말로 관심 갖는 부분은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떻게 생겨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 이것이 견해이지요.


법우님 ; 스님께서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말씀하시니 제게는 자꾸 ‘고정된 눈’이라고 들렸습니다.

 

해피스님의 답변 :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을 보는 것이지요. 인식에 참여하는 상온(想蘊) 중에서 어떤 상(想)이 지금 하나의 알갱이로 간섭해서 지금의 견해, 지금의 세상을 보는가 입니다. 하여간 그렇게 보면 어쨌든 이차인식의 결과로 무명이라는 것이 첫 번째로 생겨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딱까의 방에서 밖으로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이 (위딱까와) 견해이지요. 그래서 무명과 견해라는 것이 이렇게 우리 삶에서 갖는 비중이 있습니다.

물론 전도 경 식으로 보면 그 근본에는 또 상(想)이 있어요. 그래서 ①‘상과 심과 견해’라고 이랗게 말해도 되고, ②이차인식에서 첫째로 생겨나는 무명(십이연기의 첫 번째 지분)과 견해로 말해도 되고, ③또 딱까와 관련된 시작과 끝을 말할 수 있겠죠.



(39분 5초 ~ 42분 5초)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폭류(오가)라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이 오가가 ‘소유의 폭류’와 ‘존재의 폭류’, 이 두 개는 좀 전에 소유의 삶이냐 존재의 삶이냐로 중생의 두 가지 삶의 영역을 말했지요. 그런데 오가에는 ‘견해의 폭류’와 ‘무명의 폭류’의 두 가지가 또 있잖아요. 그래서 네 개를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소유와 존재는 그야말로 딱까의 질적 수준을 말하는 것이지요. 치유되지 않은 중생의 삶이 소유적인가 존재적인 것이냐 그것을 말하는 상태에서 (즉 딱까의 질적인 수준에서) 욕계 수준의 딱까이냐 색계∙무색계 수준의 딱까인가로 소유와 존재를 말하지요.


그럼, 이제 견해와 무명이라는 것은 어떤가요? 내면적으로 생겨나는 십이연기의 최초 지분인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것(무명)과 딱까 내면의 과정을 거쳐 세상을 만나는, (적분과 미분으로 비유하면 미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 세상을 보는 눈(견해)이 어떤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명과 견해는 아무래도 이런 내면에서 단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니까 오염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폭류는 무명과 견해의 상태를 포함해서 네 가지 폭류를 말하고 있어요. 이 개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경전(도 경(S47:43))에서는 그냥 끝에서 게송의 주제 하나로 나타나 있지만 폭류에 대해 좀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폭류라는 이것은 ①소유냐 존재냐 라는 중생의 삶의 질과 ②그 따라오는 딱까라고 하는, 이 나의 삶의 질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갈애의 형성 과정이라는 것의 안과 밖에서 (진행되는) 무명과 견해라는 두 가지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를 가지고 폭류다, 또는 달리 네 가지 속박이라고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폭류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 것이 왜 그런가 하면 상윳따 니까야가 56개가 있어요. 1번에서 56번까지인데, 1번 상윳따의 첫 번째 경이 무엇인가 하면 폭류 경입니다. 그러니까 상윳따 니까야의 그 많은 경 중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폭류 경입니다. 그래서 폭류라는 말이 나온 김에 이런 내용을 살펴보자고 생각하여 설명을 드렸습니다.



(42분 6초 ~ 50분 25초)

자, 이런 가운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만 더 관계된 이야기를 해보지요. 폭류라는 것, 이것은 어쨌든 흐름의 일종이지요. 흐름을 놓고 여기서 폭류라고 말하는 것은 좀 강력한 흐름, 뭐 이런 의미로 봐야겠지요. 좀 강력한 힘 같은 것. 그런데 이 흐름이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흐름, 이렇게 말하는 빠알리 단어가 또 다른 것이 하나 있어요. ‘소따 sota 흐름’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흐름은 두 가지 방향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해보려고 해요. 표현하자면 1) 아누소따가미 뿍갈라 anusotagāmī puggala[흐름을 따르는 사람] 이라는 용어가 있어요. 여기서 ‘아누’는 ‘이어, 뒤따르는’, ‘소따’는 ‘흐름’, ‘가미’는 ‘간다’, ‘뿍갈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누소따가미 뿍갈라’는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에서 이 흐름은 어떤 흐름인가요?


일단 접어두고 흐름이라는 말과 관계해서 또 다른 흐름을 포함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있지요. 그래요. 2) 소따빤나 sotapanna[예류자]입니다. 예류자가 소따빤나입니다. 흐름이라는 말에 실천이라는 뜻의 분사가 붙어 이것이 예류자입니다. 예류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는 보통 예류자를 ‘흐름에 든 사람’이라고 하지요. 성자이지요. 아까 그려봤던 해탈된 삶으로 나아가는 그 영역에 속하지요.


그럼 이 예류자가 들어가 있는 흐름과 아누소따가미 뿍갈라[흐름을 따르는 사람]가 따라가는 흐름은 어떤 구별이 있을까요?

여기서 ‘흐름을 따르는 사람’을 경전은 어떻게 정의해주는가 하면 ‘까마에 빠져 지내고 악업을 짓는 자’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까마에 빠져 지낸다는 것은 욕계중생의 삶을 열심히 산다는 뜻이지요. 즉 ‘내 것’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더군다나 아예 악한 업을 짓기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이것은 욕계∙색계∙무색계라는 중생의 삶 가운데 가장 낮은 레벨의 삶입니다.


법우님, 우리는 어떤가요? 소유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아직까지 소유적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는 그래도 악업은 안 지으려고 살아가는 좀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예 악업을 짓는 모범적이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누소따가미 뿍갈라’입니다. 이것은 흐름이 어떤 흐름인가요? 중생이라는 어떤 삶의 과정에서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삶이겠지요.


그런데 예류자가 든 흐름은 어떤 흐름인가요? 중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에요. 중생에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중생이라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에요. 불교에서는 해탈했다고 하는, 열반을 향하는 이런 삶이 있지요. 이럴 때에 예류자의 흐름에 든 사람은 중생에서 벗어나서 열반을 향하는 존재이지요. 흐름이 이랬대요. 경전에 따르면 두 가지 흐름이 있대요. 그런데 이 두 가지 흐름은 같은 범주에서 이런 흐름과 이런 흐름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류자의 흐름은 중생의 이쪽 저쪽이 아니니까요. 중생의 높낮이에 따르는 아래 위가 아닙니다. 예류자의 흐름은 중생의 삶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이 흘러가는 흐름과는 전혀 다른, 90도 엇갈려 있는 흐름입니다.


폭류라는 말을 공부하면서 오가(폭류)를 보았는데, 오가는 속박(요가)이라는 것과 거의 같은 구성을 갖고 있었어요. 오가(폭류)도 흐름이라는 점에서 소따 라는 말을 주목해 보면 흐름에는 이렇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고 합니다. ①열반을 향해서 흘러가는 불교 공부의 본질적인 영역, 이런 흐름이 있는가 하면, ②전혀 해탈된 삶과는 무관하게 욕계중생으로의 그저 ‘내 것 해야 해.’ 라는 소유적인 삶의 소유에 묶여 악한 업을 짓는, 이런 흐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에서는 사실 ‘예류자’의 흐름 말고는, 흐름이 대부분 (욕계 중생의 소유적 삶의) 이런 흐름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류자의 흐름 말고 아누소따가미 뿍갈라[흐름을 따르는 사람]의 흐름도 있으며, 이 두 경우는 높고 낮거나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하는 상대적인 방향이 아니라 서로 엇갈리는 것으로의 두 가지 방향의 흐름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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