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낸 이야기

47. 정(淨)의 상(想)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며

풀빛 너머 2018. 12. 10. 07:40

47. 그는 상()에는 여섯 가지 상()의 무리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에 대한 상(), 성에 대한 상, 향에 대한 상, 미에 대한 상, 촉에 대한 상, 법에 대한 상입니다. 그리고 상의 특징을 색에 대한 상의 경우로 살펴보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푸른 것도 상()하고, 노란 것도 상하고, 빨간 것도 상하고, 흰 것도 상한다.”. 그러다가 그는 해피스님의 동영상 법문을 들으며 상()함께 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는 이런 배움을 바탕으로 상()의 뜻을 생각해 들어갔습니다.

 

(): 눈으로 볼 때에도, 귀로 들을 때도, 코로 냄새 맡을 때도, 혀로 맛볼 때도, 몸으로 감촉할 때도, 마노()로 법을 분별하여 알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있습니까? 눈으로 볼 때는 나무가 푸르다고, 바나나가 노랗다고, 손녀 책가방이 빨갛다고, 할아버지 옷이 희다고 상()이 함께 알면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귀로 들을 때는 남자 목소리다, 여자 목소리다, 이것은 맑은 소리다, 저것은 거친 소리다 등으로 상이 함께 알면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로 냄새 맡을 때는 여기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저기에서는 된장 냄새가 난다, 저 너머에서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등으로 상이 함께 알면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혀로 맛볼 때는 이것은 달다, 저것은 쓰다, 저것은 짜다 등으로 상이 함께 알면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감촉할 때는 이 감촉은 부드럽다, 저 감촉은 딱딱하다 등으로 상이 함께 알면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제 마노()로 법을 분별하여 알 때는 상()이 어떤 방식으로 함께 알면서 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보았던 일, 들었던 일, 냄새 맡았던 일, 맛보았던 일, 감촉했던 일, 의도하고 사유하고 추론했던 일들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 상이 함께 알면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마노로 분별하여 알 때는, 그 법들에 대해서 무상(無常)이라는 상(), 괴로움()이라는 상, 무아(無我)라는 상, 부정(不淨)이라는 상으로 상이 함께 있을 수도 있고, / 그 법들이 항상하다()는 상, 즐거움()이라는 상, 아뜨만()이라는 상, 깨끗하다()는 상으로 상이 함께 알면서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럼 눈의 식()’색에 대한 상()’은 어떻게 다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책이 보였습니다. ()이 함께 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운 후라, 그에게는 ,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지금 눈을 떠보고 책이 보이자 여기에는 눈의 식과 색에 대한 상이 함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났던 것이었습니다. 이 생각을 자꾸 하니까 정말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으로 저것을 볼 때는 눈으로 보아서 아는 마음도 생겨나고, 책에 대해서 함께 아는 상()도 있겠구나.’ 하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시내 도서관에서 10인의 명사 초청 대강연회가 열렸는데, 스님 한분도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스님의 강연을 들으러 가서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스님은 눈으로 색()을 볼 때 안식(眼識)이 생겨나고, 이 생겨난 식이 어떻게 갈애로 부풀어지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새로 생겨난 안식이 함께 생겨난 느낌()을 분별하여 알 때, ()이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배우지 못하여 알지 못하는 범부는 상락아정이라는 병든 상()이 개입하여 무명, , 진이 생기며, 이렇게 생겨난 탐, , (무명+번뇌)에 부풀려진 마음이 갈애라고 했습니다. 무척 어려운 내용이라서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이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청중 중에서 누가 질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그런데 제가 부족하여 질문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눈으로 색을 보아서 생겨난 식이 수를 분별하여 알 때 상락아정이라는 병든 상이 개입한다고 하셨고, ‘상락아라는 병든 상이 개입해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느낌을 상락아라는 병든 상과 함께 알아서 무명, , 진의 상태가 되었고, 그렇게 탐, , (무명+번뇌)로 부풀려진 마음이 갈애라고 하셨는데, 그럼 깨끗하다고 보는 정()이라는 상()은 어떻게 작용했습니까? 이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이해한 만큼 대답해보겠습니다. 중생이 형성된 것들을 상락아정이라고 잘못 보는 것은 상락아정이라는 병든 상이 인식과정에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형성된 것들이 항상하다, 즐거움이다, 아뜨만이다고 보는 상()의 개입으로 무명, , 진이 생겨나고, 탐 진 치로 부풀려진 갈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성된 것들을 깨끗하다고 하는 정()이라는 상()은 그 범부를 욕계 중생인가, 색계 중생인가, 무색계 중생인가 하는 구분에 작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계속 대답했습니다. “깨끗하다고 보는 정()의 상()에는 욕계 중생만큼의 정상(淨想)도 있을 것이고, 색계 중생만큼의 정상도 있을 것이고, 무색계 중생만큼의 정상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지 못한 욕계 중생은 저 밖의 것들(, , , , )에 대해 멋지다, 깨끗하다, 아름답다, 좋다, 가질 만하다, ...’ 등으로 깨끗하다()는 상이 인식과정에 개입할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색, , , , 촉에 대해 내 것하려는 소유적 사유를 버리지 못하여, ‘, , 로 행위하고 나면 욕계 중생의 상()이 계속 잠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상락아의 상은 배우지 못한 범부가 존재에 대해서 잘못된 경향을 갖도록 하고, ()이라는 상은 인식과정에 중생을 욕계 색계 무색계의 어디에 속하는지를 계속 결정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깨끗하다는 이 상(淨想)이 무엇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하고 여겼는데, 오늘 와서 들으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성된 것들을 깨끗하다고 보는 이 경향 때문에 배우지 못한 어리석은 범부는 눈으로 저 색들을 볼 때에도 저 색이 깨끗하다는 상()이 함께 알고, 귀로 저 소리를 들을 때에도 저 소리는 깨끗하다는 상이 함께 알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에도 저 냄새는 깨끗하다는 상이 함께 알고, 혀로 맛보아도 저 맛은 깨끗하다는 상이 함께 알고, 몸에 감촉이 닿아도 저 감촉은 깨끗하다는 상이 함께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배우지 못한 어리석은 범부는 색, , , , 촉에 대해 이런 깨끗하다는 상이 함께 알기 때문에 바깥 것들에 대해서 내 것하려는 소유적 사유를 떨쳐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늘 스님의 강연에서 들은 내용을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인식과 행위로 이루어져 있고, 인식 과정에는 한 순간 이전의 삶이 그대로 실려 와서 참여하는 새로운 식의 생김과, 식이 수를 분별하여 알 때 상락아정의 병든 상이 개입하여 탐진치로 부풀려진 갈애가 형성되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