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에 전기수는 집을 나섰습니다. 더위가 한풀 꺾였고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전기수는 사띠(마음챙김, 알아차림)하면서 길을 걸었습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을 떨치며 발걸음을 알차렸습니다. 골목길 신호등에 다다르자 일부 사람들은 신호를 무시한 채 길을 건너갔습니다. 전기수는 신호를 기다리며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바람 쐬고 햇빛을 받으며 산의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넜습니다. 읍사무소 가는 길목에 재래시장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5일장이 서는 날이 아니라서 시장은 조용했습니다. 전기수는 계속 사띠를 연습하면서 길을 걸었습니다. 발을 들어 올리고 내리거나 손을 흔들 때 알아차리며 걸었습니다. 읍사무소에 도착하니 <사전투표>하는 안내문이 보였습니다. 몇 개 읍에 사는 주민들이 투표하려고 속속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전기수가 투표장소로 가보니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20대, 30대의 한창 때를 맞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온 사람도 있었고 인증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젊은이다운(또는 건전한 시민다운) 건강함과 용기와 자신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고서야 새삼 전기수는 자신이 50대의 중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생각났고, 곧 자신에게도 늙음이 닥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어났습니다.
전기수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신분증을 제시하고 확인 절차를 거쳐 투표 용지를 받았습니다. 투표용지가 여러 장이나 되었습니다. 시장, 시의회의원, 군수, 군의회의원, 교육감, 지지정당 등을 뽑아야 했으므로 투표용지가 6장이나 7장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았으므로 기표소에서 누가 기표를 다하고 나와야 다음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차례가 되어 전기수도 기표소에 들어가서 투표권을 행사했습니다. 투표용지에 기표를 다 하고 나서 반으로 접었습니다. 그리고 기표소를 나와서 참관인이 보는 앞에서 투표용지를 모두 투표함에 넣었습니다.
투표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전기수는 잠시 읍사무소 옆에 있는 군민독서실 앞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새삼 뒤돌아보게 된 ‘50대 중년’의 나이와 앞으로 닥칠 ‘늙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렸을 때의 가난한 기억들, 중학교 때의 추억들, 고등학교 때의 통학하여 학교 다녔던 모습들, 대학 시절의 낭만과 공부와 사색들, 직업을 가지며 살아온 날들. 그리고 이제 문득 자신에게 젊음이 끝났고 중년의 나이가 되어 늙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현실들.
그러다가 전기수는 어제 동영상 □□에서 배운 ‘사성제(四聖諦)’를 떠올리며 뜻을 음미해 보았습니다. 그때 어떤 분이 다가와 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도를 닦는 손○○입니다. 혹시 사장님께서는 진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이야기를 나누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전기수는 자신도 진리에 관심 가지고 있다며 대화를 나누겠다고 했습니다.
손○○은 진리는 하나라고 했습니다.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끝에 가서는 다 똑 같다고 했습니다. 바로 세 분 성인들께서는 ‘인간의 행복, 인간의 번영’을 위해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이에 전기수는 그 말씀만으로는 좀 부족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마치 ‘모든 스포츠는 다 똑같다. 모두 건강한 신체, 건전한 정신을 위한 것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 추상적이라고 했습니다. 전기수는 물론 세 분 성인들께서는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해 가르침을 펴셨겠지만, 인간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세 분 성인들의 목표점은 서로 달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손○○은 어떻게 세 분 성인들의 행복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른지를 사장님(전기수)이 한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전기수가 말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국가) 속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갈지, 또 그런 일들이 어떻게 정치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지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창조와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의롭게 살고 봉사하면서 살며 죽어서는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그렇게 인간의 행복을 위해 가르치셨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공자님께서는 주로 살아있는 동안의 일로 말씀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의 일로도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불교는 행복의 기준이 재가자와 출가자가 달라서, 재가자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서는 욕계 천상이나 인간의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이고 출가자는 해탈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이 전기수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그럼 이제 사장님은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전기수는 자신이 불교신자라서 불교의 진리를 말해보아도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손○○은 그런 것쯤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요점만 간단히 말씀해보시라고 했습니다.
전기수가 말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첫 번째 진리로 ‘이것은 괴로움이다.’고 선언합니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짐도 괴로움이다, 불만족스러운 것들과 만남도 괴로움이다, ...’고 말합니다.”
손○○은 왜 태어남이 괴로움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전기수는 이 괴로움은 철저하게 알아야(알려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이런 일들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진리에 다가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전기수가 말했습니다. “불교의 두 번째 진리는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이다’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다시 존재로 이끌고 즐김과 탐(貪)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자(者)’인 갈애 즉 소유의 갈애[욕애(慾愛)], 존재의 갈애[유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의 갈애[무유애(無有愛)]라고 합니다. (☆☆☆☆의 번역에서 인용) 사람에게 병이 나면 그 병의 원인을 찾아내어 제거하듯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이 갈애는 버려져야 된다고 합니다.”
손○○은 갈애(愛)가 어떻게 ‘탐(貪, 탐욕)’과 다르고 ‘욕탐(慾貪)’과 다르고 ‘욕망(欲望)’과 다른지를 물었고 전기수는 동영상 □□에서 배운 대로 들려주었습니다.
다시 전기수가 말했습니다. “불교의 세 번째 진리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는 것입니다. 즉 갈애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탐, 진, 치의 멸진이 열반이라고 한다 합니다. 이 괴로움의 소멸은 실현해야 된다고 합니다.”
전기수가 계속 말했습니다. “불교의 네 번째 진리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의 성스러운 진리이다.’고 합니다. 그것은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로서,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라고 합니다. 이 팔정도는 닦아야 된다고 합니다.”
'지어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3. 동화 - 충치 ** (0) | 2018.07.16 |
---|---|
32. 남의 마음을 아는 경우 (0) | 2018.07.03 |
29. 어떤 도(道)를 말씀하십니까? (0) | 2018.06.10 |
28. 몸은 닦지 않고 마음만 닦습니까? (0) | 2018.05.28 |
27.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기 일부 (0) | 2018.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