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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교재에서 보는 자와 관련하여 다시 보면

풀빛 너머 2017. 9. 9. 18:42


▣ 대념처경 - 사념처 개요[보는 자와 염처의 관계](부산 수행 170829)

   [동영상] https://youtu.be/eseBuTzgHLE



(37분 15초 ~ 41분 20초)

6. 교재에서 ‘보는 자’와 관련하여 다시 보면

자, 이 교재 224쪽을 보겠습니다. ‘사념처의 개념에서 보는 자와 염처의 관계’라고 했거든요. 지금 제가 설명 드린 내용이 첫째로 보는 자, 일차인식에서 보는 자는 마노(意, 의)이지요. 의(意)가 보는 자가 되어서 일차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결과 1번’ ①식의 몸통-외입처의 앎과 ②수(受)가 생겨나지요. 이때 외입처의 앎을 관찰하는∙이어보는,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신념처예요. 그런가 하면 ‘결과 2번’인 수(受)를 이어보는 관찰이 수념처예요.


그리고 나면 이제, 그러니까 이것이 중요한 개념이 수행이 전개되는 거잖아요. 보통 우리가 말하는 수행이 깊어지는 거잖아요. 수행이 깊어지면서 우리 내면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첫 단계 신념처 수념처 까지는 보는 자가 마노에요. 일차인식이지요.


그런데 이제 마노가 보는 일차인식을 통해서 수행이 깊어진 거예요. 신념처 수념처 수행을 잘 하면서 수행이 깊어지니까 깊은 영역으로 수행은 더 깊어간 거지요. 그래가지고 이제 여기 식이 몸통으로 대상이 되었지만, 자기 활동성에 의해서 이차인식하는 이 과정은 (어떤가요?) 이차인식에서 보는 자는 누군가요? 식(識)이 보는 자이지요. 일차인식에서는 의가 보는 자였다면, 이차인식에서는 인식주관이 식이잖아요, 인식 객관이 수이고(요). 그러니까 보는 자가 식인 거예요.


이것은 그냥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깊어지는 그 상황에서, 삶의 메커니즘에 의해서 사는 이야기가 그려지면 이렇게 깊어진 상태에서 식이라는 마음의 활동성이 (보여진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우리한테 식이 활동하고 있지요. 그러나 식의 활동을 못보고 있는 거지요, 깊은 곳에 있으니까. 그러나 이런 신념처 수념처의 과정을 통해서 수행이 깊어지면 ‘식이 보는 자가 되어서 이차인식 하는 그 과정’을 보게 된다는 개념이지요.


그래가지고 여기(교재)에서 보면 신념처에서 생겨난 외입처의 앎(인) 식이 보는 자가 된 거지요. 식이 보는 자가 되어가지고 이차인식을 하면 이차인식의 결과로 탐진치 뭐 이런 수의 앎을 보태서 심의 몸통이 알려지는 거지요. 그래서 이차인식을 통해서 수의 앎을 이어보는 이것, (즉) ‘어떤 심이 생겨났을까?’ (하고) 이것을 보는 것이 심념처인 거예요.


그러고 나면 더 깊어진 그 상태에서는 이제 드디어 법이 드러나는 거예요. 내면에 법이 드러나게 되면 이렇게 내면에서 생겨난 심까지도, 깊은 수행의 힘에 의해서 심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가 이제 관찰이 된 거지요. 그래서 법이 드러난 마음에는 심(心)이 보는 자가 되어서 드러나는 법을 관찰한다, 그것이 법념처(이지요).



(41분 21초 ~ 43분 43초)

7. 맺음말

(교재의) 이 그림, 이것이 사실 굉장히 어려운 그림인데, 메커니즘적인 이해가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대념처경이, 사념처 수행이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그림 식(방식)의 설명이 없이는 사실은 (사념처 수행의 의미를) 말할 수가 없다 라고 봐야 할 거예요. 자, 아무튼 이 그림을 대충 할 수 있는 것으로 하고(요). 참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가지고 이해했다, 이렇게 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현재 (정리해)보면 어때요? 우리가 ①②이런 마노가 보는 자가 되어가지고 식과 수를 만드는 신념처 수념처, ③(수행이) 깊어져가지고 식이 보는 자가 되어가지고 심을 만드는 심념처, 그리고 ④심이 보는 자가 되어서 드러나는 법을 관찰하는 법념처 중에 지금(지난번 수업에서는) 얼마를 온 거예요?

첫째로 ‘준비 과정을 했다’라고 하는 것이 (호흡을) 붙잡는 것, (칠판의) 여기까지 한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로) 이제 ‘신념처를 다 보았다’고 하는 것이 사실 (칠판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여기까지 온 상태에서 그래도 이렇게 대상에 대한 앎을 빠자나띠-분명히 볼 수 있게 되면, 그때 고개를 돌려서 함께 결과되는 그 느낌을 ∙ 경험을 대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여) 이제 수념처로 넘어가는 거지요.


자 오늘 (잠시 뒤에) 보려고 하는 수념처는 이렇게 신념처까지 심화된 다음에, 이제 내 안에서 경험되는 그 느낌을 분명히 분별하자, 빠자나띠 하자 해서 넘어가는 거예요. 자 (수념처는) 그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