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장구 간단히

대학장구 경1장을 들으며 7 (물유본말~)

풀빛 너머 2017. 2. 17. 10:29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明德爲本 新民爲末 知止爲始 能得爲終 本始所先 末終所後 此結上文兩節之意.


(강의 필기 중에서)

*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 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마침이 있으니

(‘물과 사’. 물에는 본과 말이 있음. 본이 있으면 말이 있고, 시가 있으면 종이 있고, 본체가 있으면 본체로 인한 작용이 있고, 먼저 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 할 것이 있고, 여기가 뿌리이면 저기는 가지이고, 여기가 근원이면 저기는 지류고. 그래서 이쪽 것하고 저쪽 것을 서로 말을 짝지어서 다 씀.)

*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리라) :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깝게 될 것이다.


* 명덕위본(이요) : 명덕(밝은 덕)은 근본이 되고

(본이 있어야 말이 올 수 있다. 위정자가 밝은 덕을 지니고 있어야 백성을 신민할 수 있고)

* 신민위말(이며) : 신민(백성을 새롭게 함)은 끝이 되며

* 지지위시(요) 능득위종(이니) : : (지극히 선한 곳에) 머무를 것을 안다는 것은 시작이 되고,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마침이 되니

(‘자전거는 사람이 타는 것이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이고, 실제로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알면 얻는 것(득)이라고 한다. 따라서 아는 것은 시이고 얻는 것은 종이다.)

* 본시(는) 소선(이요) 말종(은) 소후(라) : 근본과 시작은 먼저 할 것이요, 끝과 마침은 뒤에 할 것이다.

* 차(는) 결상문양절지의(니라) : 이것은 윗 글의 두 구절의 뜻을 총괄하여 결론한 것이다. (이것(=‘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후즉근도의’)은 윗글의 두 구절(‘명명덕’과 ‘신민’)의 뜻을 총괄하여 결론한 것이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니)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리라) : 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마침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그동안 잘 있었니?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이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래, 사람도 있고, 새도 있고, 짐승도 있고, 산도 있고, 나무도 있고, 책상도 있고, 책도 있고, ... 수없이 많은 것이 있지. 그럼, 이런 것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 있을까? 주자학에서는 이런 것을 설명할 때, ‘리(理)라는 말을 쓰는 가 봐. 자, 이 부분 강의 들은 것을 말해볼게.



(사물이란 말이 처음 나옵니다. 그런데 보통 한문에서 물(物)이 곧 사물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물은 존재하는 어떤 것입니다,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다 물입니다. 나, 남, 나무, 돌, 새, 짐승, 칠판, 분필 들은 모두 물입니다. 또, 나는 아버지에 대해 자식이고 누구의 형이고 동생이고, 이것은 분필로 쓰는 곳인 칠판이고 이것은 칠판에 쓰는 분필입니다, 이것은 모두 물(物)입니다.


그런데 물은 혼자 딱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나는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남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합니다. 자식은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형은 동생과 관계를 맺고, 칠판은 분필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다른 것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존재할지를 모릅니다. 일단 내가 여기 강단에 있는 것도 다른 것과 함께 존재합니다. 나는 나 아닌 다른 것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물도 중요하겠지만 존재하는 것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식으로 부모로 형으로 동생으로 존재할 때 자식으로 부모와 관계를 맺는 것이 사(事)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배우고 가르치는 것도 사(事)입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일(事)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하는 것입니다.


아까 우주가 있다고 했을 때 우주는 거대한 원리가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편재해있다고 합니다. 이 우주의 원리가 인간에게 스며들면 성(性)이고 사물에 스며들면 리(理)라고 합니다. 그래서 물에 들어있는 것을 물리(物理)라고 하고, 이런 물과 물이 관계 양상을 맺을 때의 리(理)를 사리(事理)라고 합니다. 이때 물리를 주자학에서는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 사리를 소당연지칙(所以當之則)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물은 ‘그러한 까닭의 이유(소이연지고, 所以然之故)’가 있다는 겁니다. 물을 물이게끔 만들어주는 그런 원리, 까닭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물과 물이 만나는 사리는 ‘마땅히 그러해야하는 바의 법칙(소당연지칙, 所以當之則)’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지식은 ‘그러한 까닭의 이유’로서 그러한 원리를 받아서(품수, 稟受) 태어난 존재이므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이 가지고 있는 리를 존재(存在)라고 하고, 사가 가지고 있는 리를 윤리(倫理)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자학에서는 존재와 윤리가 같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여담인데, 동양에서 왜 물리에 대한 자각이 있어서면서도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나요? 물리란 사물의 이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사로서의 이치도 있습니다. 이것과 이것이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지고지순한 것이 무엇인가가 관심의 집중입니다. 그래서 외부 사물에 대한 집중으로 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런 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사에는 끝과 처음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하면 도에 가까운가요? 물에서는 근본을 먼저하고 말단을 차츰 미루어가서 하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물을 놓고 볼 때 주변과 사를 맺을 때 가장 가까운 것이 식구, 직장, 우리나라, 지구, 우주 이렇게 넘어갑니다. 관계 양상을 맺을 때 선후의 차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자기와 가까운 곳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사랑하지 않고 지구 전체를 사랑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니? 좀 어렵지? 쓰는 용어들이 어렵고 개념으로 사유해야 하니까 또 어려워. 주자학에서는 이 세상의 이치를 그렇게 파악했나 봐. 잘은 모르지만 이(理)로 파악했나 봐.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 볼게. 여기에 외계인이 나타났어. 외계인이 지구의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를 물었어. ◌◌이는 어떻게 대답할래? 그래,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것 같아. 이처럼 이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방식이 학파나 종교에 따라 다를 거야.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이치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 이치는 부처님이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있대. 2개가 있다고 해. 존재하는 것들이 가진 특징으로 1개(3개)가 있고, 괴로움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으로 1개가 있대. 바로 삼법인과 연기(십이연기)라고 한대.


그럼 이제 삼법인(제행무상, 제행개고, 제법무아) 중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내가 배워서 아는 만큼 이야기해 볼게. 제행무상은 (무명 위에서) 형성된 것들은 항상하지 않다는 뜻이래. 내가 예를 들어볼게. 빵을 먹고 나서 맛이 좋았어 - 그러나 이 맛은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지를 못하고 빵을 먹기를 그만두면 맛은 사라지고 말아. 내가 친구를 만나서 기뻤어 -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다른 일을 하느라고 그 기쁨은 항상하지 않고 또 사라지고 말아. 아기가 태어났어 - 그러나 아기는 태어난 그 상태로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자라서 청년이 되니까 아기의 몸도 무상한 것이야. 조금 전에는 기분이 나빴는데 이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면 이 기분도 무상한 것이야.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무명 위에서) 조건 따라 생겨난 것들은 항상하지 않다고 해. 내 몸과 마음을 살펴 봐. 이 몸도, 이 마음도 한 순간 그대로 항상 그 상태인 채로 머물러 있지를 못해. 내 몸은 점점 늙어 가. 그래서 무상하다고 해. 마음도 항상 그대로 있지를 못해. 범부는 한 순간 탐욕에 빠졌다가 어느 순간에는 성냄에 빠졌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거든. 이렇게 몸이라는 물질도, 느낌과 가치관도 의도한 것들도 마음도 다 무상한 것이래. 이것이 삼법인 중의 하나인 제행무상의 이치라고 한대. 주자학과는 접근하는 방식이 좀 다르지? 학문마다 종교마다 다를 것 같아.


아차, 한 가지 빠뜨렸네. 그럼 형성된 것들이 무상하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볼게.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하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할까? 나는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내 벌벌 떨어야 할까? 아니란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열심히 살아가야 한단다. 마찬가지로 이 몸이라는 물질도, 느낌이나 가치관이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들이나 마음 그 자체도 항상 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무상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야 한단다. 악한 행위를 버리기 위해, 선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단다. 이것이 무상한 것들 가운데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자세란다.



(다음 글은 다음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쯤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