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빛 너머

지어낸 이야기 7 - 49재는 지내야 합니까?

풀빛 너머 2016. 11. 23. 12:31

다성이 대학 4학년이었을 때, 학철을 따라 ◌◌ 동아리에 가보았습니다. 거기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이름을 칠지라고 했습니다. 칠지는 말과 행동과 마음씀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올바른 행실로 모범을 보이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제어하고 진실을 말하려고 했으며 남에게 비난받을 악한 행위는 어느 하나라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성은 칠지에게 자신은 경행도 잘 못하고 호흡 보는 수행도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칠지는 경행이 어려우면 길을 갈 때 사념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내 보라고 앴습니다. 그리고 들숨 날숨을 관찰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단계의 수행이니까 초보자는 쉽지 않다면서 발바닥의 감촉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성은 그날부터 길을 걸어갈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길을 걸어가는 데만 주의를 기울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안전한 길이라면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촉을 알아차리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콧구멍 근처에 주의를 두는 일조차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다성은 우선 숨소리만이라도 듣고 있자고 해보았습니다. 

  

어느 날 다성과 학철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도를 아느냐고 묻더니만 시간을 좀 내어달라고 했고, 나중에는 조상 천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학철이 “태어나면 모두 죽습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기 전에 영혼(영가)이 그 태어날 곳을 못 찾아서 잠시 머문다는 그런 말을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서 그 영혼(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해준다는 말은 더욱 믿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겨울 방학을 맞아 다성은 학무동에 돌아왔습니다. 겨울이라 나무에는 잎사귀들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다성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권 부자를 찾아뵈었고, 동네 친구들도 보았습니다. 친구들은 이제 모두들 조금씩 더 성숙해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다성은 자신의 처지를 조금은 서글프게 느꼈습니다.


당시에는 명상 서적을 읽는 것이 조금은 유행이었습니다. 다성도 크리슈나무르티와 라즈니쉬의 명상 서적류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불안, 공포, 자유, 신(神), 자아(自我), 사고(思考), 명상, ...’ 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성은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내용들이 자신의 삶에 활용되지 못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학철은 어느 정도 자신의 철학과 생각이 정립되었고, 나름대로 명상도 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하루는 천안계에 있는 법해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권 부자는 다성에게 쌀 한 가마니를 부치면서 모월 모일에 법해 스님과 그 제자분들을 집에 초청하니 방문해 주시기를 간청드린다고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성이 법해사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어서 인기척이 있을 때까지 마당을 거닐었습니다. 예전에 배운 경행을 하면서, 한쪽 발을 들면 ‘들어’라고 마음속으로 부르고 발을 내려놓으면 ‘놓음’이라고 마음속으로 하면서 마당을 거닐었습니다.


이윽고 법해 스님께 인사를 드렸고, 불이 스님과 다른 스님들과도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모두들 잘 계셨습니다. 불이 스님은 계와 수행이 더욱 깊어지신 것 같았습니다. 다성에게 호흡 관찰이 어려우면 ‘몸에 대한 부정관(不淨觀)을 닦는 것이 좋겠다면서 부정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성은 이 부정관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생각이 많은 다성에게는 잘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월 모일이 되었습니다. 권 부자는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모였고, 이웃 마을 이룡동(螭龍洞)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법해 스님 일행이 방문하자 권 부자는 자리를 권하고 손수 음식을 드렸습니다. 모인 사람들도 모두 권 부자가 마련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서 법해 스님이 오계와 보시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나쁜 행위와 말로 짓는 네 가지 나쁜 행위와 마음(여기서는 의(意))으로 짓는 세 가지 나쁜 행위를 들려주고, 이것들을 멀리 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사람들을 불행한 곳, 처참한 곳으로 이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법해 스님의 말이 끝나자 이룡동에서 온 배 동장(洞長)이 말했습니다.

 “스님,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제 49재를 올릴까 합니다. 스님께서 이 일을 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그러자 법해 스님이 말했습니다. “먼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살아서도 행복하셨고, 돌아가셨어도 행복한 세상에 태어나셨기를... 그런데 거사님, 저는 49재를 지내지 않습니다. 법해사에서는 49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자 배 동장이 그 이유를 들려달라고 했고, 법해 스님이 답변했습니다. “거사님. 저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이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을 위해서 축원하고 제사한다고 하여 그 죽은 사람을 더 좋은 세상으로 가게 하는 그런 내용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저는 49재를 지내달라는 재가불자님들의 말씀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거사님의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오니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배 동장은 선뜻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른 절에서는 49재를 지내주는데 왜 법해사에서는 안 지내주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법해 스님이 다시 대답했습니다. “거사님, 이 경우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기 서쪽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 축원하고 제사지내고 어떤 의식을 거행하여 그 죽은 사람을 하늘 세상에 태어나게 해줍니다. 어떻습니까? 법해 스님도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저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배 동장이 잠시 머뭇거리자 법해 스님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사람이 죽어 하늘 세상에 태어나든 아니면 다른 세상에 태어나든 그 일은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은 그가 행한 업에 따라 과와 보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악업이나 선업은 모두 개인에 딸린 문제이므로 이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짊어줄 수가 없습니다. 늙음과 죽음의 문제는 개인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더구나 죽음 이후의 49재 같은 일은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 번 재물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 남에게 줄 때, 과연 그 결과를 얻게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법해 스님이 계속 말했습니다. “남에게 베풀 때 그냥 베풀고 싶으면 자기가 주고 싶은 이에게 베풀면 됩니다. 그러나 공덕을 얻기 위해서 남에게 보시할 때에는 ‘적게 보시해도 큰 결실을 얻을 수 있고, 많이 보시하면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곳에 보시해야 합니다.’ 여기 49재를 지내려고 하는데, 과연 이 49재라는 행위에 공덕이 있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가는 것인지 안 가는 것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한 바에 의하면, 죽은 이를 위해 축원하고 제사지내고 어떤 의식을 거행하여 그 죽은 이를 하늘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배 동장은 마지못해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다른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법해 스님과 제자들이 돌아갈 때 배 동장이 다가가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스님,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를 위해서 제자분들 중에 한 사람을 좀 보내주실 수 있겠는지요? 제 아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전생에 이무기로 있다가 주역을 1000번을 읽으려고 하다가 999번을 읽고 그만 죽어 그 한을 못풀었다고 하여 지금 동네 한 쪽에 돌로 1000층을 쌓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법해 스님은 배 동장의 말을 듣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내일 불이를 보내서 배 동장님의 자제분을 만나보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배 동장은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룡동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성은 내일 불이 스님을 안내하여 배 동장 댁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