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낸 이야기

15 만화같은 사랑

풀빛 너머 2018. 3. 2. 19:41


15 오 사장이 말했습니다. “저희는 사업 때문에 시내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명숙의 할아버지께서 제 사업을 크게 도와주셨습니다. 작은 성의입니다만 이 집과 옥토(沃土) 열 마지기를 드리겠습니다. 사양치 마시고 받아주십시오.” 명숙의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사장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저희 모녀에게 마음 써 주시다니 너무 과분한 말씀이세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 하시며 명숙을 잘 공부시키라고 유언하셨어요. 어려운 부탁인 줄 알지만, 또 염치도 없지만, 이 저택과 우리 마을에서 가장 좋은 논을 주시는 것 대신으로 명숙을 대학까지 보내주시면 어떠하신지요? 오 사장님께 간청해요, 우리 명숙을 함께 데려가셔서 공부시켜 주세요. 너무 큰 부탁을 드려 송구해요.”

 

오 사장은 이 집과 논 열 마지기라면 명숙을 공부시키고도 많이 남으니 아주머니께서 직접 명숙을 공부시키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명숙 어머니는 자신은 배운 것이 없어서 딸을 제대로 공부시킬 수 없으니 오 사장님께서 대신 잘 공부시켜 주십사고, 그러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 사장은 그것이 돌아가신 명숙 할아버지의 유언이시라면 명숙을 데려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팔아서 명숙 어머니에게 생활에 보태 쓰시라고 모두 주었습니다.

 

시내로 이사 온 날 오 사장은 아들 유민에게 말했습니다. “유민아, 너는 이제 중학생이 되었고, 명숙은 초등학교 4학년이다. 여동생처럼 돌봐주고 아껴주어라. 명숙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오늘날 내 사업이 이렇게 번창하게 되었으니 우리는 그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명숙은 오 사장 내외분과 유민을 따르면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오 사장은 가족 여행을 갈 때면 꼭 명숙을 데리고 갔습니다. 오 사장 부인은 시장에 갈 때면 명숙을 데리고 가서 옷도 사주고 맛있는 음식도 사주었습니다. 유민은 자기가 재미있게 본 책을 주기도 하고 함께 가다가 친구들을 만나면 고향 여동생이라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명숙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고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유민은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명숙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중학생이 되었어요. 꿈을 가져 봐요. 나날이 자신을 계발하고 향상하세요. 그리고 그만큼 또 성숙하세요.” 반 친구들은 새 마음 새 자세로 공부하겠다며 새로운 계획을 짰습니다. 명숙도 새삼 꿈과 희망이 가슴에서 솟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성공하여 어머니를 편안하게 행복하게 해드려야겠다는 포부가 점점 확고해졌습니다. 하교해서 집에 돌아온 명숙은 일일생활계획표를 새로 만들어 책상 앞에 붙여놓았습니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에 명숙은 오 사장 내외분, 유민과 함께 여행을 갔습니다. 차창 너머 보이는 풍경이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었습니다. 여름이라 풀과 나무가 무성했고 곡식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멀리 스쳐가는 사람들 모습도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보일 때마다 유민은 저기 봐 저기 봐 하면서 감탄했습니다. 도중에 유민은 명숙에게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들려주었습니다. 체육대회에서 진짜 농구 선수처럼 경기를 펼쳤던 친구들 이야기, 음악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테너로 불러주신 가곡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시민회관에서 학년별로 음악 발표 대회했던 이야기들. 명숙은 신기한 듯 재미있는 듯 기대되는 듯 유민의 말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몇 년이 흘러 명숙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유민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명숙은 학교 공부하랴 학원 다니랴 시골에 계신 엄마에게 안부 전화하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오늘은 고민 상담 시간을 줄 테니 고민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학생들은 공부 고민, 성적 고민, 친구 고민, 부모와의 의사소통 고민, 형제 고민, 진로 고민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적절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이웃 학교에 다니는 한 남학생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며, 그 친구는 그 남학생에게 말도 한 번 못 꺼내고 혼자 속만 태우다가 병이 났는데, 친구로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친구가 남학생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자꾸 생각나고 그립고 말 건네 보고 싶어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병이 났구나.”

 

그러면서 선생님은 그 친구에게 들려 줄 여러 가지 경우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러고 있으면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여 이제 그만 남학생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는 경우, 내가 아름답고 멋질 때 남이 나를 더 좋아할 텐데 이렇게 병이 나서 초췌하게 있으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 잊어버리고 학업에 열중하자고 분별있게 대처하는 경우, 또는 우리 학생이라면 대체로 그러듯이 마음에 드는 가수나 탤런트나 운동선수들이 성공하여 잘 되기를 바라며 이 학생 시기를 보내는 경우, ...

 

그러자 질문했던 학생이 친구의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나요, 선생님!” 했습니다. 이에 선생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기는 첫째가 학업이란다. 이 시기는 머리가 좋아지고 정신이 활발하여 많은 것을 배워 익힐 수 있는 시기란다. 이 시기를 놓치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의 감정은 상황에 따라서 변해 바뀐단다. 어릴 때는 어린이만큼의 호감이 있고,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청소년만큼의 순진한 감정이 있단다. 그러나 그 시기들이 지나면 또 다른 시기만큼의 그리움이 나타나기도 한단다. 왜냐하면 내가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내가 공부한 만큼 내가 성숙한 만큼 변해 바뀌기 때문이야. 그래서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면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상황과 조건들이 또 변해 바뀐단다. 그러니 이 시기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익혀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쌓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명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 새 학교 새 친구들 새 교수님 첫 강의들.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미팅, 엠티, 축제, 과 체육대회, 중간고사, 스펙을 쌓기 위한 여러 활동들, 기말 고사, 방학. 이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명숙은 나름대로 근면하고 성실하게 한 학기를 잘 마쳤습니다. 방학이 되자 명숙은 어머니가 계신 곳에 내려가 모녀지간에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으로 미팅에 나갔는데 아주 잘 생기고 멋진 남학생이 넌지시 명숙에게 전화번호를 달라는 것을, 자신은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며 거절했고, 그 다음부터는 미팅을 안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명숙이 대학 2학년이 되었고 유민은 제대한 후 바로 복학했습니다. 명숙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유민은 대학 1년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보낸 명숙이 자랑스럽고 대단하다며 앞으로 남은 학년들도 잘 보내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면서 군대에서 겪은 재미난 이야기와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형이 아우에게 들려줄 법한 인생 담화처럼 구수하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명숙은 이야기를 들으며 방긋 웃었습니다.

 

명숙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가끔 남학생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때마다 명숙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사양했습니다. 유민은 복학하자마자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봉사활동도 자주 나갔습니다. 취업 공부와 나머지 필요한 공부도 근면하고 성실하게 해나갔습니다. 유민을 좋아하는 여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유민은 후배님, 한발 늦으셨습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고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사양했습니다. 이에 여학생들은 위로 삼아 밥을 사 달라고 했고, 유민은 학과 선배로서 후배를 위하는 마음으로 밥을 사 주었고,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행동했습니다.

 

어느 날 명숙은 유민에게 부탁을 하나 받았습니다. 유민이 고교 동창회 모임에 나가야 하는데 파트너 동반 모임이라서 누구와 함께 가야 하는데, 시간이 되면 명숙이 함께 좀 참석해줄 수 있는지, 그러면 너무 좋겠다고 했습니다. 명숙은 행복한 듯 환하게 웃었습니다. 일주일 후 명숙과 유민이 함께 참석했는데, ‘커플 마음 맞추기이벤트가 있었습니다. 각기 다른 내용의 질문지들이 들어있는 상자에서 여자기 하나를 뽑아 문제를 속으로 읽고 그 답을 뒷면에 적으면, 사회자자 남자에게 질문을 하여 답과 맞추어보는 방식이었습니다.

 

명숙 차례가 되었습니다. 뽑은 질문지를 읽고 답을 적었습니다. 사회자가 질문지를 받아들고 말했습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때는 언제입니까?” 동창생들은 기대 반 웃음 반으로 유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민의 대답은 뜻밖에도 별을 바라보던 날이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이러면 안 된다며, 이러면 벌을 줘야 한다고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회자가 참 공교롭다며 여자의 답을 공개했습니다. “달을 바라보던 날이에 동창생들이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비록 별과 달이 낱말은 서로 달라 정답은 아니었지만 별과 달이 상대방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최고의 정답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자가 재량권을 발휘하여 이 커플은 정답을 반만 맞힌 걸로 해서 선물의 반만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명숙과 유민이 공동으로 전자 밥통을 받자 사회자가 활짝 웃어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명숙은 대학 4학년의 마지막 학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고 익혔습니다. 전공과목에 대한 풍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필요한 교양도 쌓았고,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과 역량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도 교수님의 추천 소개서를 가지고 몇 군데에 취직 원서를 넣었습니다. 며칠 후 한 곳에서 서류 전형을 통과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습니다. 전공과목뿐만 아니라 시사 상식도 많이 알았으며, 단정했고 교양이 있었고 성격도 밝았으므로 명숙은 최종 관문을 통과하여 졸업하면 바로 입사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오 사장과 명숙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한 명숙의 거처를 상의했습니다. 마침 명숙의 작은 외삼촌이 근처에 살고 있으니 명숙을 작은 외삼촌댁으로 보내자고 합의했습니다. 명숙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이사하면 그동안 의지하고 따랐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도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리움이 생기고 그리움에서 괴로움이 생기는 법이었습니다. 그러면 너무 힘들 테니 명숙은 더 크고 넓은 마음을 내기로 했습니다. 시골의 동네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대하듯이, ‘아저씨, 아주머니, 유민 오빠가 행복하시기를 무탈하시기를, 그분들이 아프지 않기를 위험이 있다면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그분들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나도 함께 기뻐하기를, 격정에 휩싸이지 말고 평온한 마음으로 그분들을 대하기를하면서 자신을 제어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외삼촌댁에서 지내며 직장을 다닌 지도 몇 년이 흘렀습니다. 명숙 어머니는 나이가 찼다며 자연스럽게 딸의 혼사를 거론했습니다. 선볼 상대를 고르며 신랑감을 물색했습니다. 그러나 명숙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엄마는 안 그러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명숙 어머니는 얘야 그러다가는 어느 세월에 결혼하겠느냐며 결혼은 엄마 말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명숙이 말했습니다. “그럼 몇 주만 기다려 주세요. 엄마!

 

며칠 뒤 유민이 명숙 외삼촌댁을 찾아왔습니다. 명숙 외삼촌 내외분과 명숙 어머니, 그리고 명숙에게 줄 선물을 많이 사 가지고 왔습니다. 명숙 외삼촌 내외분께 인사를 드리고 환담을 나눈 뒤에 명숙과 유민은 정답게 이야기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명숙이 엄마가 자신을 선보게 하려고 애태우신다고 말했습니다. 유민은 먼저 명숙이 이렇게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서 너무 좋고 너무 기쁘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계발하고 향상시키려고 노력해서 이렇게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되어 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을 보는 일과 관련하여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명숙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오빠보고 결혼하라고 하셔요?” 유민이, 어머니는 결혼 말씀은 없으시고 단지 아들이 마음에 둔 사람이라면 언제나 대환영이라고 하신 적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명숙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한 가지를 더 물었습니다. “오빠는 좋아하는 여자 분이 계셔요?” 유민은 너무 너무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명숙의 얼굴이 부끄러운 듯 붉어졌습니다. 명숙이 또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분을 좋아하셨어요?” 유민이 처음으로 별을 보았을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명숙은 점점 더 가슴이 두근거렸고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별처럼 반짝이며 웃었습니다.

 

그때 유민이 휴대폰을 받으려고 잠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명숙은 기쁨과 행복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살며시 심호흡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을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존중해주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해준 유민이 정말 고맙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유민은 아버지께서 전화하신 것인데, 이제 가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민은 자기 집에서 내는 수수께끼가 한 개 있다며 들려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라는 수수께끼인데 힌트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우리가 크게 도움 받았던 한 고마운 할아버지의 손녀, 둘째 우리와 함께 이 집에서 십년 이상 살았던 학생, 셋째 우리 아들의 아내로 꼭 맞고 우리 며느리로 꼭 맞는 사람. 명숙이 행복하여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날 저녁 명숙은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했습니다. “엄마, 제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지요? 그 사람도 저를 좋아해요. 그분 부모님께서도 저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엄마는 이제 선볼 신랑감을 안 구해도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