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수바산냐와 수바니밋따
▣ 대념처경 - 법념처2[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부산 수행 170913)
[동영상] ☞ https://youtu.be/MftH8R4rwmk
(1시간 9분 46초 ~ 1시간 12분 40초)
5 수바산냐(淨想)와 수바니밋따(淨相)
그런데 ‘신(神)의 분신’이라고 하면서 어떤 신의 특성을 가상적으로 설정해놓고 나면 어떤 상태로도 오염되지 않는 깨끗함이라고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정상(淨想)-수바산냐’이지요. 이 수바산냐, 깨꿋함이라고 하는 경향이 작용하면 어떻게 되어요? 그대로 무명이 실려오는 거지요. 깨끗함이라고 보는 무명이 실려오는 거예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일단) 이렇게 표현해 봅시다. 볼게요.
그렇게 되면 욕탐에 의해 실려 가서 왜곡이 되는데, 어느 수준으로 왜곡되는가 하면 결국은 탐진치의 근본자리에서 깨끗하다라는 이 경향이 죽 메커니즘을 타고와서 간섭했거든요. 그래서 왜곡되기를 어떻게 왜곡되는가 하면. (눈으로 본다고 가정해보면) 보이는 것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내가 (볼 때는) 왜곡된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 왜곡된 것이 어느 만큼 왜곡되었습니까? (라고 하면) ‘아, 이차인식의 과정에서 정상-깨끗하다고 하는 이 왜곡된 경향이 삶에 참여해서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니까 루빠니밋따입니다.’ ‘그런데 그 루빠니밋따가 어느 만큼 왜곡된 상태인가 하니 바로 수바니밋따(로 나타납니다). (즉) 수바산냐의 간섭에 의하여 그 왜곡된 것을 수바니밋따라고 이렇게 표현하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보아야 하는 것이, 수바산냐도 정상이고, 수바니밋따도 우리말로는 정상이에요. 그런데 ‘상’이라는 한자가 다른 거예요. (수바산냐-정상(淨想), 수바니밋따-정상(淨相) 그러니까 ①번뇌를 말하는 이 자리에서는 오온의 ‘상(想)-산냐’가 쓰인 것이고, ①이것이 간섭해서 과정을 타고 오면 그 왜곡이 얼마만큼 왜곡되었을까? 라고 말할 때는 수바니밋따(로 쓰인 것이지요. (그것은) 깨끗하다는 그런 경향성에 의한 왜곡이라고 이렇게 말해주는 거지요. 그렇게 수바니밋따라는 말을 이해를 하자고요.
(1시간 12분 41초 ~ 1시간 15분 48초)
6. 다시 저항의 상과 진에
그러고 나면 (교재의) 그 밑에 진에의 자양분으로는 무엇이 나오나요? 저항의 상(相)이라고 했는데 ‘빠띠가니밋따’이지요. 이 빠띠가니밋따가 뭔가요? 번뇌 중에, 번뇌가 보통은 ‘욕루, 유루, 무명루’라고 하여 탐과 관련된 쪽에서 번뇌를 말하지만, 그러나 분명히 진과 관련되어 빠띠가산냐-저항한다(는 상도 나옵니다). ‘싫어!’ 하면서 괴로운 느낌에 대해 밀쳐내려는 이런 저항적인 경향이 있고, 살다보면 우리가 늘 즐거운 느끼에만 대응하는 것이 아니지요. 괴로운 느낌을 대응할 때 ‘나는 이 괴로운 느낌이 싫어’ 하면서 밀쳐내려는 그것이 ‘빠띠가산냐-저항의 경향(상, 想)’인 것이지요.
이 저항의 경향이 참여하면 진(嗔)으로 연결되어 (메커니즘에서는 대표로) 탐을 말했지만 탐진치를 다 싣고 온 거지요. 그러니까 저항의 산냐가 전개되어서 실려오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자, 보이는 것은 다 왜곡이 되었으니 루빠니밋따인데, ‘얼마만큼 어떻게 왜곡되었어?’ 라고 말하면 여기서 ‘빠띠가니밋따’(가 되는 것이지요). (빠띠가니밋따는) 빠띠가산나의 간섭에 의해 왜곡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빠띠가니밋따)은 저항의 상(相),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사실은 이것이 순환구조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일차인식의 과정에서 정상(淨相) -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이런 대상에 대해 ‘이것이 깨끗한 것이여’ 라는 왜곡된 질적인 수준을 가지고 인식을 하나끼 어떻게 되어요? 왜곡된 인식 상황이 그대로 딱까를 통해서 행위로 연결되어 오니까 그것을 싣고오는 욕탐이 어떤 욕탐이 되었는가 하니까 까마찬다가 된다, 이렇게 말을 하는 거지요.
그런가하면 저항의 상으로 왜곡된 인식이 있으면 그대로 딱까의 과정을 거쳐서 사유에 속하는 간탐과 진에, 이 자리에서 바로 이렇게 저항의 니밋따가 인식되었기 때문에 (메커니즘을) 타고 와가지고 진에라고 하는 장애 ⦁ 진애라고 하는 덮개가 일어난다, 이렇게 말해주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