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중간 결론
(59분 48초 ~ 1시간 4분 3초)
4. 중간 결론
우리가 지난 번에 이런 것도 보았지요. 수행을 말할 때 눈에 비유를 하잖아요. 그런데 눈은 무엇이지요? 기본적으로 쨋따(心)이지요. 보는 자는 찟따이지요. 그런데 눈이 있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지요. 눈을 감으면 못 보지요. 그래서 ‘눈을 뜨자’라는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사띠가 합니다. 그리고 불을 밝혀주어야 본다고 했는데, 불을 밝히는 일은 빤냐가 합니다. 그리고 눈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의 사마디(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띠 사마디 빤냐’ 라는 세 가지 기능이 함께 하여 삶을 (향상으로) 이끌어가는 것인데, 이때 사띠와 빤냐가 작용해주어야 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지요.
빤냐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하면, 수행의 중심 개념에서 보았지요. 우리 마음이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가 대응하지요. 사념처가 장애를 밀어내주는 만큼 칠각지가 팽창하여 삶을 깨달음으로 이끌지요. 그런데 이 장애는 무엇인가 하면 지혜를 무력화시키는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그래서 사념처를 통해서, 즉 사띠를 힘있게 해서 장애를 밀어냅니다. 그래서 사띠가 올라가면 장애가 줄어드는 만큼 지혜는 따라서 올라갑니다. 사띠와 빤냐의 이 관계를 우리가 기억하고 있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자, 문지기인 사띠가 있고,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전령이 문지기의 선택에 의해서 들어와서 성주를 만나서 지혜를 매개로 열반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사띠가 자기 일을 잘 해주어야,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잘 들어와서, 같이 힘 있어진 지혜에 의해서, 식이라는 마음한테 열반의 소식을 전해주지요. 연결 관계가 이렇게 되지요. 이것은 사실 어려운 비유이기는 한데, 지금 우리가 이것을 설명할 때 그동안 수행과 관련하여 공부한 여러 가지를 다 써서 하고 있지요. 하여간 이렇게 설명은 되요.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한 쌍의 전령이 들고 나가는 이 길이 무엇인가 하니 팔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구분하여 (우리는) 사마타 수행처(입니다), (우리는) 위빳사나 수행처(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요.
사마타-위빳사나 라는 이 역할을 함께 하는 한쌍의 전령이 다니는 길이 팔정도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팔정도 수행(입니다. 라고)’ 이렇게 말을 해야 됩니다. (다시) 그것을 좀 풀어서 말하자면, 사념처에 의해서 와서 사마타 위빳사나를 함께 말해주는 ‘사념처-사마타-위빳사나 수행’이라고 말하든가 (아니면) ‘팔정도 수행’이라고 말해야 부처님이 말하는 수행에 접근한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어쨌든 필요한 이야기를 다 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