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16-2. 비유 - 한 쌍의 재빠른 전령

풀빛 너머 2017. 7. 17. 21:22


▣ 대념처경 - 신념처7[일어남 사라짐의 용례2)낑수까나무 비유경](부산 수행 170711)
   [동영상] https://youtu.be/onI8Z35Nr7I



2. 비유 - 한 쌍의 전령

그 다음에 한 쌍의 재빠른 전령이라고 했는데, 이 전령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말합니다. 이때 한 쌍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함께 나오는 것)는, 사마타를 하는데 위빳사는 안 하고 위빳사나는 하는데 사마타는 안 하는 이런 개별적인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조심스럽지요. 요즘 수행처에서 보면. 어떤 곳은 사마타 수행을 주로 표명하잖아요. 그런가하면 어떤 곳에서는 상당히 위빳사나라는 말로 수행을 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곳은) 우리는 사마타 없이 삼매 없이 순수 위빳사나로 수행한다고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이 곤란하다는 거예요.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한쌍으로 같이 가는 거예요. 사마타가 위빳사나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고, 위빳사나도 사마타와 함게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나요? 메커니즘으로 볼 때 이차인식에서 식이 수를 상의 부대하에서 인식을 하면 무명 위에 탐과 진(이 생기고), 이것을 합쳐서 심으로 가고, 갈애로 가고, ... 이런 메커니즘이 있잖아요. 이때 사마타가 무엇인가 하면, 탐의 문제를 해소하는 ∙ 이탐 ∙ 탐을 제거하는, 이것이 사마타입니다. 그래서 경전은 ‘사마타를 하면 찟따가 계발된다, 찟따가 계발되면 이탐한다, 이탐하면 심해탈한다.’ 고 정의해줍니다.


그리고 상이 병들면 번뇌이지요. 이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나게 하는 이것을 소멸이라고 부르고, 이 소멸하는 수행을 위빳사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차인식이라는 딱까 우리 삶의 내면의 문제를 해소하는데, 위빳사나라는 방법으로 소멸해서, 즉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나는, 그러면 그 위에 탐과 진이 안 생깁니다. 이것이 수행방법이지요.


이렇게 가면 될 텐데 사실은 이렇게 못 가지요. 왜냐하면 속옷을 갈아입으려면 겉옷부터 갈아입어야 하는데, 가장 밑바닥에 최후로 남아있는 문제거리인 그놈을 먼저 치유하자고 하니(까 안 되지요). 이것이 북핵문제를 해소하려면 참수부대를 보내어 김정은을 어찌하자는 (그런 것은 잘 안 되는 것처럼) 이런 현실적인 면과 나의 내면에서 번뇌라는 그놈을 부수면 다 해결될 테니 번뇌 부수는 특공대를 보내어 번뇌를 먼저 부수자는 것이 안 되는 거예요, 삶의 문제에서는.


그러니까 속옷을 벗으려면 겉옷부터 벗어라는 것 때문에, 위에서 여실지견해서 딱까에 문 열고 들어와서 염오하고 나면, 염오하고 난 이후에 사마타로 이탐하여 탐의 문제를 풀고, 그 위에서 위빳사나로써 소멸하여 무명의 문제를 푸는 거예요. 이렇게 수행이 되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사마타에 의해서 탐이 해결되고 위빳사나에 의해서 무명이 해결되는 이러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는 한 쌍의 전령이 열반의 소식을 전한다라고 했잖아요. 즉 사마타 위빳사나를 통해서 열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사마타로 탐을 제거했다고 해서 열반이 되나요? 안 되는 거예요. 사마타로 끝장을 못 내요. (그럼 사마타 없이) 위빳사나로 무명을 제거했다는 것이 되나요?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사마타가 먼저 탐을 제거해주어야 (합니다). 겉옷을 먼저 단계적으로 벗어주지 않으면 속옷은 못 벗는 거예요. 이러니까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따로 떼어내어 사마타 수행처가 (따로) 있고 위빳싸나 수행처가 (따로) 있고 (라는), 이것은 경전에 의하면 불가능해요. 그냥 팔정도 수행이 있는 거예요.



2-1 - 팔정도 수행

팔정도 수행은 이러이러한 (것이지요). 우리가 수행지도로 말하는 것이지만, 업을 제어하고 삼매에 들면 바른 삼매라고 하는 토대가 만들어집니다. 그 바른 삼매를 심화시켜가는 과정으로의 내적인 마음의 사마타(가 있고), 그 과정에서 법이 드러나면 법을 관찰하는 것으로의 법의 위빳사나(가 있고), 이 과정을 거쳐서 드러나는 법의 상태를 관찰했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라고 존재의 실상을 알게 되면 여실지견(하게 되고), 이 여실지견이 딱까라는 내면의 방, 갈애의 형성 과정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실지견을 해야 비로소 딱까라는 방 안으로 들어와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는다는 염오를 해서 난디를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여기서부터 안의 문제를 풀고, 그럼으로써 존재의 형성 과정을 제외한 형성 이후의 모든 과정이 염오로써 완성이 됩니다. 그러면 그때에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두 가지 방법이 함께 작용을 해가지고 찟따가 생겨나는 과정에서의 탐의 문제와 무명의 문제를 함께 풀어줌으로써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팔정도 수행입니다).


이것은 사마타 수행도 아니고 위빳사나 수행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념처-사마타-위빳사나라는 하나의 연결된 수행이고 이것들 한 마디로 말하면 팔정도 수행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설명드린, ‘필수품으로 업을 제어하고 ~’ 부터 시작되는 것이 우리가 수행지도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팔정도를 설명하는 그런 그림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는) 사마타 수행처, (여기는) 위빳사나 수행처(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실 올바르지 않아요. 올바른 표현을 하자면 팔정도 수행처가 있어요. 그 팔정도를 구성하는 것이 사념처-사마타-위빳사나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수행이지요).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다 한 단계를 끝내어야만 다음 단계로 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지요. 우리가 구차제정 공부에서 보았듯이, 일 단계 만큼을 가면 일 단계의 뒷부분도 가고, 이 단계를 올라가면 이 단계 뒷부분도 가는, 단계지어진 영역과 단계지어지지 않는 영역으로 구분하여 수행을 설명하잖아요. 

 

어쨌든 우리가 주목해야 됩니다. 열반의 소식을 전해주러 오는 전령은 반드시 쌍으로 옵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한 쌍, 이 개념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51분 59초까지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