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15-3. 상속(相續)의 용어를 설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풀빛 너머 2017. 7. 13. 04:30


▣ 삶의 메커니즘 14)[욕탐 & 식의 머묾](윤회의 진실 170706)
   [동영상] https://youtu.be/jh9D9SOS3Gg



(47분 55초 ~ 56분 49초)

3. 상속(相續)이라는 용어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점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불교교리 중에 ‘상속(相續)’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상속은 매순간순간 한 순간 이전의 것을 이어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속이란 개념은 니까야에는 없는데 후대에 가서 생겨납니다. 즉 일차결집의 경과 율에는 상속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후대에 삶을 설명할 때 지금 이 현재 삶의 순간이 과거와 미래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한 순간 이전의 삶과 한 순간 이후의 삶이 연결되어 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그래서 상속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차결집 때의 경과 율에는 그것을 말하는 용어가 없어요. 그러다가 뒤에 가서 상속이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한 순간 이전과 한 순간 이후가 상속이라는 개념에 이해서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차결집에서는) 상속이라는 말을 안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한 순간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실은 상속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탐이라는 개념을 보았잖아요. 욕탐은 (의업을) 부추겨서 드러내고, (또 욕탐은) 양방향성을 가져 일차인식에 옵니다. 일차인식에 올 때 어떻게 오나요? 한 순간 이전의 내면의 상황을 싣고 옵니다. (그럼) 한 순간 이전의 상황이 과거로 참여하나요?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보아야 하겠지요.


(예를 들면 조금 전에 1번 상황을 거친 1번 욕탐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제 지금) 2번 상황의 내입처가 2번 상황의 외입처를 인식할 때 1번 상황의 욕탐이 참여합니다. 2번을 현재라고 하면, 1번은 과거입니다. 과거는 현재라는 입장에서 보면 어쨌든 이전 것입니다. (2번 상황의 내입처와 2번 상황의) 현재 상황을 놓고, 한 순간 이전의 상황을 어떻게 연결해왔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후대의 교재에서는 상속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부처님은 이 용어를 안 쓰셨습니다. 왜냐하면 일차인식에 무명의 요소인 욕탐이 함께 한다는 이 말 자체가 ‘현재가 과거와 함께 한다’는 말이니까요. 

 

한 순간 이전의 상황이 연결됩니다. 욕탐의 양방향성에 의해서 한 순간 이전의 상황을 그대로 싣고 지금 상황에 함께 참여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구조 자체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구조가 끊어진다면 끊어지는 곳을 연결하기 위해 상속이라는 개념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부처님이 상속이라는 말을 안 하신 이유는 상속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구조 자체가 한 순간 이전의 상황을 그대로, 달리 말하면 과거라는 욕탐이 ∙ 욕탐이라는 과거가 일차인식이라는 이 현재 상황에 과거로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차인식에서 내입처가) 외입처를 인식하는 거기에 (과거라는 욕탐이) 현재 상황으로 참여합니다. 과거가 그대로 현재가 되어 일차인식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상속이라는 개념이 필요 없이 삶은) 과거와 현재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부처님은 하십니다.


그래서 ‘찬다’라는 말이 ‘까마’라는 용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라고 제가 말할 수도 있지요. ‘욕탐이라는 것은 양방향성을 가지고 온다, 한 순간 이전의 내면의 상황을 싣고 온다’, ‘이것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가 하면, 삶의 연속성을 부여한다’, 이런 개념을 말할 수 있죠? 사실 이것은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어쩌면 조금 전에 미웠는데 나는 왜 계속 미워하고 있는 거지? 이럴 수도 있습니다. 수행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조금 전에 미웠는데, 그 미운 것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 어디선가 잘라주지 않으면, 과거의 그 미웠던 마음이 그대로 현재에 참여해서 미움이 이어집니다. 이것을 어디에서 끊을까요?

구체적으로 폭력적인 행위거나 말은 계를 지키는 일을 통해서 여기서 끊어주어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생각으로(생각에서 일어나는) ‘저 나쁜 놈’ 하는 것은 어디에서 끊어줄까요? (칠판에서) 여기서 끊어야겠지요. 겉에서 끊는 것이 계(戒)이고 겉에서 끊는 것이 내면의 영역에서 끊는 것보다는 쉽겠지요.


오계를 지켜서 겉에서부터 끊어내는 것도 수행이고, 좀더 가서 사유∙생각한다는 의업의 자리에서 끊어주는 것도 수행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위딱까라는 이 자리에서 끊어내자고 할 수도 있고 위딱까는 제2선의 자리에서 끊어질 수 있겠지요. 더 나아가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는 이 자리에서도 끊어낼 수 있겠지요. 이렇게 점점 내면적으로 끊어가는, 심화된 수행의 영역이 있지요.


어쨌든 삶은 연속성이 부여됩니다. 이 연속성의 부여는 ‘한 순간 이전에 너를 미워했는데 왜 지금도 너를 미워하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순간 이전에 너를 이뻐했는데 왜 지금도 너를 이뻐하고 있는가?’ 는 연속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안 되지요. 그래서 후대에 와서 상속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라도 삶은 연속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처님은 무명의 요소(욕탐)가 일차인식에 참여한다는 이 한 마디 말을 통해서 삶이 연속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개념을 보는 것이 무지무지하게 중요합니다. 욕탐(에서 욕), 그러니까 어쩌면 찬다라는 말은 까마라는 말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불교에서는 까마와 찬다가 구분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