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빠자나띠 (분명히 안다)
▣ 대념처경 - 신념처2[호흡수행 준비과정 기법](부산 수행 170530)
[동영상] ☞ https://youtu.be/sN7fU1AzVyg
(12분 5초 ~ 17분 45초)
1. 오늘 수업의 중심 : 빠자나띠
* 지금 이야기하려는 오늘 수업의 중심에 한 가지를 두고자 하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 호흡 수행의 전체
(가) (몸과 마음이 방해받지 않는) 자리를 잡자 → (마음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 마음을 고정한다 → 콧구멍 (주위를 지향하자) → 사띠를 생겨나게 하자 → 사띠하면서 들이쉬고 내쉬자 : 여기까지가 지난 수업 시간에 한 호흡 수행의 도입 과정입니다.
(나) 그 다음에는 ①빠자나띠(분명히 안다)1 → ②빠자나띠2 → ③호흡 전체를 경험하자(온 몸을 경험하면서 호흡하자) → ④호흡을 가라앉히자(신행을 고요히 하면서 호흡하자) : 여기까지가 후렴을 제외한 호흡 수행의 전체입니다. (가)는 준비과정이고 (나)는 본과정입니다.
* 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디일까요? 구체적으로 하려는 일이 무엇일까?, 이 측면에서 보면 준비를 갖추고 난 후 분명히 아는 일을 하자, 그러고 나면 그 뒤에 분명히 아는 일을 더 잘하려니까 온 몸을 경험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호흡을 가라앉히자, 이렇게 나오고 있거든요.
어떻게 비유를 드는가 하면, 돌리면서 길게 돌아가면 길게 돌아간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e로아가면 짧게 돌아간다고 분명히 안다, 라고 이 네 가지를 포함하는 (나)의 이 단계를 비유해줍니다. 그런데 비유는 (나)의 ③, ④번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①, ②번으로 하니까, 제가 보기에는 <분명히 안다(빠자나띠)>, 이것이 호흡 수행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중심까지를 간다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정정진(바른 노력)이라는 것이 (나오지요. 정정진은) 좋은 상태가 만들어지면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데, 단지 유지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향상으로 증장하는 요런 노력이잖아요. 분명히 안다라고 이 상태를 하나의 목표로 만들어놓고 ③, ④번은 더욱 잘하기 위한 다음 단계라고, 요렇게 보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보자면 일단 이렇게 정리를 한번 해보지요.
(17분 46초 ~ 24분 19초)
우리가 지금 호흡이라는 것을 가지고 뭔가 일을 하고자 하는데, 그 중심에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니, <빠자나띠>입니다. 그런데 이 빠자나띠라는 것이 사실은 ‘지혜와 함께 아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이 좀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면 우리가 아는 바른 지혜로 본다, 또는 아빈냐-수승한 지혜, 또는 빠린냐-완전한 지혜, 이런 정도로 올라 갔을 때, 빠자나띠하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존재의 실상을 ‘무상 고 무아’라고 꿰뚫어 아는, 이런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지금 요 자리(호흡)에서 나타나는 빠자니띠는, 어쨌든 위자나띠(인식하다)에 빤냐(지혜)가 같이 작용하는 상태를 말해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 호흡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이 빠자나띠는 그렇게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알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만악에 이것을 꿰뚫어 안다는 개념으로 보면 ‘호흡이라는 이것이 숨은 쉬고 있지만 사실은 무상고무아인 것이여’ 라고 이렇게 알아야 꿰뚫어 아는 것이 되겠지요.
그런데 지금 호흡 수행에서 여기는 뭐라고 말해져요? 호흡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호흡이 길게 들어오는 것인지 짧게 들어오는 것인지, 길게 나가는 것인지 짧게 나가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라고 하는 것이지, 호흡이 존재이기 때문에 그 실상이 무상 고 무아라고 꿰뚫어 알라고 경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냥 이 호흡에 드러나 보이는 현상적인 모습을 빤냐로써 보아야 한다고 (말해요). 이럴 때는 꿰뚫어 안다가 아니라 호흡의 ‘현상을 분명히 안다’, 이렇게 이해해야 되겠지요.
아무튼 경전이 제시하는 바가 그것이에요. 내가 지금 쉬고 있는 이 숨이 길게 들어올 때는 이 숨이 무상고무아라고 이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들이마시고 있는 이 호흡이 긴 호흡이라고 하면 길다라고 분명히 알아라, 요렇게 말하고 있지요. 일단 호흡에 대해서 그 ‘현상을 분명히 알자’ 라고 하는 것이 신념처 호흡 수행의 중심이다, 그렇게 보자구요.
자, ‘분명히 안다(빠자나띠)’고 하는 이것은 어쨌든 ‘인식’이지요. 안다라는 일을 잘 하고자 하니까 인식하자 라는 개념이에요. 인식을 하자라고 하면 이제 이 호흡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까요? 호흡이라는 것이 그냥 공기가 들고나고 하는 이것을 그냥 뭐 호흡이다, 이렇게 접근해 가지고는 사실은 이것을 인식을 못하지요.
이 호흡이, 즉 공기 알갱이가 들고나면서 나한테 어떻게 인식되는가? 메커니즘적으로 우리가 일차인식의 자리를 보아야 하지요. 그래서 호흡이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신념처(호흡 수행)에서 대상이 되는 것은 호흡 자체라기 보다는 호흡이 내 피부에 (남기는 느낌입니다.) 피부가 무엇인가요? 신근(身根)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공기 알갱이가) 신근이라는 감각기관에 닿아서 느낌을 남기게 됩니다. 호흡이 촉(觸)해서 남기는 느낌, 공기 알갱이가 들락거리면서 내 피부에 남긴 느낌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대상이지요.
그래서 이 촉이라는 것이 어디에 닿습니까? 라고 하니까 눈에 닿는 것이 아니지요. 피부라고 하는 몸의 감각기관인 신근에 닿는 거예요. 그리고 이 ‘신근’과 ‘촉’, 요 상태에서 인식작용이 일어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인식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몸 혼자(피부) 하는 것은 아니지요. 신근과 연결된 것으로 이제 의(意, 마노)라는 것이 함께 해주어야 하지요. 그래서 나의 마노가(내 마음이) 눈으로 쫓아가서 호흡을 보자 라고 하면 못 본다는 거지요. 어쨌든 내 마음이 신근이라고 하는 인식작용의 그 무대 위로 올라와 주어야 하지요. 이것이 뭐에요? ‘콧구멍을 지향하자’는 것이 그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