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7-1. 행(行)을 통해 / 행 없이

풀빛 너머 2017. 5. 1. 10:15


▣ 대념처경 준비과정2[네 가지 실천](부산 수행 170425) ㅡ 용어 번역 변경 : 실다운 지혜 → 수승한 지혜

   [동영상] https://youtu.be/R1kAUfasfAk



(49분 32초 ~ 53분)
정력적인 노력 경(A4:169)을 참고하세요.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①지금 여기에서 행(行)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②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行)을 통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③지금 여기에서 행(行)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사람은 ④몸이 무너지고 난 뒤 행(行)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드는 자이다.”

1.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아라한을 성취하는 자)를 두 가지(또는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①이 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아라한이 되는가? 아니면 이 몸이 무너지고 나서 다음 생에 아라한이 되는가?
②이 두 가지 구분을 놓고 다시 - 어떤 사람은 ‘행(行)을 통해’ 완전한 엷반에 들고, 어떤 사람은 ‘행(行)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2. ‘행(行)을 통해’ : ‘행(行) 없이’
①행(行)을 통해 - 이때 행(行)은 행위를 한다고 볼 것이 아니고, ‘즐겁고(즐거운 방법으로 제시된 것)’와 ‘괴롭고(괴로운 방법으로 제시된 것)’ 중에서 괴로운 방법으로 수행을 하여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뜻으로 보겠습니다.

②행(行)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 즐거운 방법으로 아라한이 된다, 깨닫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 그런데 여기서 즐거운 방법은 무엇인가요? 오늘 수업을 통해서 가장 힘주어 결론을 내고자 하는 것이 사실은 이것입니다.



(54분 28초 ~ 59분 19초)

수행은 기본적으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우리가 수행지도를 그려냈지요. 사념처 수행으로 호흡 보는 것을 통해서 바른 삼매에 들고 - 바른 삼매위에서 드러나는 법을 아짜땅 쩨또 사마타로 심화시켜나가는 가운데 - 담마위빳사나를 통해 여실지견합니다. - 그러면 여실지견했다, 즉 딱까라는 내면의 방의 문을 열었다. - 그래서 들어가서 ‘염모이탐소멸’의 과정, 달리 말하면 사념처를 완성한 위에서 - 사마타위빳사나의 완성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이것이 수행지도이지요. 이렇게 수행지도를 통해 그려진 이 방법을 ‘행(行) 없이’ 라고 합니다.


수행지도대로 깨달음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의 길로 나아가는 그것이 바로 수행으로 가는 하나의 길입니다. 달리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는 개념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즉,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다른 액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외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호흡을 붙잡고 삼매로 가는 지도상의 길을 직접 가기 어려우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어쨌든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예리한 탐진치를 풀어내어야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타고난 탐진치를 없애어 수행의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몸을 보고 이 몸이 부정하다고 혐오하는 이런 노력을 통해서, 또는 음식에 혐오하는 상을 통해서, 또는 세상에는 즐길만한 것이 없다는 상을 통해서. 어쟀든 이런 방법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원래의 길에 올라서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수행의 조건이 좋은 사람(즐겁게 수행하는 사람은) 그냥 깨달음으로 가는 부처님이 제시하는 하나의 길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냥 호흡을 붙잡고 거기(깨달음)로 가면 됩니다. 다른 것은 신경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편상 내가 태어나기를 탐진치가 너무 강하다거나 바르게 수행을 할 여건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깨달음으로 가는 그 하나의 길로 직접 출발해서 가지 못합니다. 이때는 어떻게든 내가 여건을 만들어서 그 길에 올라서야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 길에 올라서야 팔정도 바로 그 길을 실천할 수 있고, 팔정도의 실천에 의해서 깨달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괴로운 방법에 의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깨달음으로 가는 바로 그 길에 올라타기 위한 어떤 액션이 필요합니다. 그 길에 올라타기 위한 어떤 조건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개념이겠지요. 그런 개념으로 제시된 것이 몸의 부정관을 닦는다거나 음식에 혐오하는 상(想)을 닦는다거나 세상에는 즐길만한 것이 없다는 상을 닦는 등의 괴로운 방법이고, 이런 방법으로 수행하는 그 길이 바로 행(行)을 통해 완전한 열반에 든다고 정의가 된 것이지요.



(59분 20초 ~ 1시간 2분)

법우님 : 호흡이 잘 안 되는 사람은 몸의 31가지 부정상을 관찰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해피스님 : 예, 그것이 좋아요. 호흡이 안 되는 사람은 그런 방법을 통해서 ‘호흡을 붙잡을 수 있는 힘을 기르자.’ 하는 방법은 좋아요.

그런데 결론으로 그것을 갖는 것은 좀 조심해야 합니다.


제(해피스님)가 볼 때는 분명히 이런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보고 하나의 길에 대해서 확실하게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호흡을 붙잡고 삼매에 가는 길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타고난 조건이 나빠서 호흡을 붙잡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몸의 31가지 부정상을 관찰하는 부정관을 닦아야겠다’라고 나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은 좀 조심스럽습니다.


‘행 없이’와 ‘행을 통해’로 구분되는 이 이야기를 보면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호흡을 붙잡고 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동안 올바른 방법을 몰랐든지, 아니면 이 노력의 어떤 과정이나 강도 들이 부족해서 호흡을 붙잡고 삼매로 못 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타고나기를 탐진치가 너무 많아서 못가는 것인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전대로 수행하기’를 통해서, 즉 수행지도를 바르게 배워서 이 수행방법을 정확하게 실천하는 일을 통해, 삼매로 가고 삶을 향상할 수 있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한테서 가능하다면 어떤가요? 그때는 그동안 ‘내가 탐진치가 너무 강한 사람으로 태어났어. 나는 호흡을 못 붙잡아. 그러니 나는 몸의 부정관을 닦아야겠다.’ 라고 해 온 것이 사실은 나를 오해하고 괴로운 방법을 선택해서 가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마이너스가 될 수 있습니다. 그 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저는 이 생각을 합니다. 우리 법회에 오셔서 공부하는 우리 법우님의 보편적인 조건 상태가 탐진치가 너무 강하게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아직까지 정확한 길에 접근하지 못해서 좀 늦었을 수는 있지만, 우리 법우님들은 경전대로 수행하여 (괴로운 방법이 아니고 즐거운 방법으로) 호흡을 붙잡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법우님께서 ‘나는 타고난 상태가 안 좋아서 호흡이 잘 안 붙잡혀져.’ 라고 스스로를 결정했다고 하면, 저는 사실은 법우님에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아요.’ 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을 말리고 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