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이해

5-2. 인식의 단계적 향상

풀빛 너머 2017. 4. 12. 19:18




▣ (S47-49~50)[인식의 단계적 향상(지혜) ㅡ 바른 지혜-실다운 지혜-완전한 지혜](부산 수행 170404)
   [동영상] https://youtu.be/uYEz0cIqCUg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35분 20초 ~ 38분 58초)

사띠토대,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아까 우리가, 사념처에 잘 확립된 마음, 이것을 보았지요. 사띠는 기본적으로 행위를 제어하는 역할이지요. 그래서 다섯 가지 단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행위를 제어하는 역할이 사띠이지요. 그 사띠가 ‘사념처수행을 완성했다’라고 하면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사띠가 완성되었는데, 그 사띠가 완성된 그 상태는 내적이든 외적이든 행위는 완전히 제어된 상태를 말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완성된 사띠의 자리(=사념처의 끝)’, 이 자리를 이제 비로소 말하기를, ‘사띠라고 하는 행위의 단속에 의한 삶의 제어가 완성이 되었어. 이제 그 앞 단계에서 진행된 찟따가 형성되는 과정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토대가 완성되었어.’ 라고. 이런 개념으로 ‘사띠아야따나(사띠토대)’라는 말이 쓰여요. 이것은 제사선하고 다른 겁니다.


이렇게 사띠토대가 생겨나면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해야할까요? 먼저 찟따의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차인식의 결과로) 찟따가 생겨나는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하면 번뇌라는 하나의 원인 때문에 무명이 일차적으로 생겨나고, 그 위에 이차적으로 탐(貪)이 생겨나지요. 무명과 탐이 무엇인지를 오늘은 설명하지 말자고요. 이렇게 두 단계로, 무명이라는 일차적인 문제에다가 탐(이라든가 진(嗔))이라든가 하는 이차적인 두 가지 문제 상황이 있어요.


그러니까 속옷을 갈아 입으려면 겉옷부터 갈아 입어야하는 것이 동일하게 적용되지요. (칠판에서 선을 그어 놓은) 이 과정 이후에는 우선 해야 하는 일이 탐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탐을 제거하는 이 일은 어떻게 하나요? 염오해서 행위가 제어되었다는 이 상태는 사띠의 완성인데, 사띠의 완성 이후에는 어떻게 하나요?


자, 우리가 마음을 도와서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 일은 누가 하지요? ‘사띠-사마디-빤냐’ 세 가지이이지요. 사띠가 완성된 이 상태에서 이제 삼매의 완정 과정이 있어요. 사띠토대 위에서 마지막으로 삼매를 심화하는(완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탐을 제어해요, 이것은 염오된 상태를 유지해주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탐을 제거하는 이 과정이 사마디(삼매)이고, 삼매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삼매의 완성 과정)을 사마타라고 불러요. 그래서 경전에 의하면 사마타는 무엇 하는 건가요? ‘탐을 제거하는 것이다, 사마타는 찟따를 닦는 것이다, 찟따를 닦으면 탐이 제거된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래서 이 찟따가 탐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삼매의 완성 과정으로 사마타가 있어요.



(38분 59초 ~ 41분 9초)

그러면 이제 (칠판에서) 여기까지 온 거지요. 그러면 이제 요런 탐이 없는 상태(무탐, 무진의 상태)를 유지해주려면 그 밑에서 무명이라는 이 놈을 또 마지막으로 마무리지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명은 번뇌에서 오는 근본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무명을 제거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번뇌를 부수는 거지요. 그래서 멸(滅)이라는 말을 알잖아요.


멸이라는 말은 무엇이지요?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나 것을 멸(니로다)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이것(멸)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누진(漏盡, 번뇌를 부순다)이라고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이 과정(행위의 단속, 갈애의 제거, 번뇌를 부수고 ...)은, (저기) 사띠, (또 여기) 사마디의 두 가지 기능에 이어, (마지막 남은) 빤냐 라는 최후의 기능이 역할을 하지요. 빤냐의 힘으로 번뇌를 부수고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나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말하고, 그것을 위빳사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①사띠아야따나까지 오는 수행과정은 사념처이고, 이 사념처의 완성, 수행의 중심 개념에 의하면 장애가 완전히 제거되고 칠각지로 가득찬 그 상태에서 ②사마타로 삼매를 완성해서 탐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러고 나면 ③마무리로 번뇌를 부수고 무명을 버리는 이 과정은, 위빳사나로써 빤냐가 완성되어 번뇌를 부수어서 이 일을 하는 거지요. 그것이 육신통의 누진통, 또는 삼명의 누진명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혜해탈하는 데는 누진이면 되지요. 이렇게 해서 위빳사나로 빤냐가 완성됨으로써 삶이 완성되는 거예요. 근본 자리에 있는 번뇌를 부순 거예요.



(41분 10초 ~ 45분 19초)

이렇게 딱까 내면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나면 이제 이 이야기가 가능한 거예요. 위자나띠라고 하는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있지요. 그리고 이 인식작용이 수행을 통해 빤냐가 단계적으로 향상하면서 삶이 완성됩니다.

* 빤냐의 단계적 향상에서 첫 번째 단계는 삼마빤냐(바른 지혜)입니다.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여실지견이지요. 여실지견해서 딱까라는 내면의 방에 문 열고 들어가는 그 자리가 바로 바른 지혜입니다.

* 그 상태에서 이어가지고 염오해나가 ‘행위’영역의 모든 문제를 제어합니다.

* 이제 남은 것은 찟따의 형성과정의 문제만 해결하면 됩니다. (칠판에서 줄 그은) 이 단계, 사띠아야따나 이 상태가 무엇인가 하니 실다운 지혜(아빈냐), 아빈냐에 의해서 실답게 아는 상태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실지견이 사실은 실답게 알고 본다라고 해야 되는데, 옛날에는 여실지견과 아빈냐를 구분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실다운 지혜, 실답게 안다 이것 번역을 그때는 (그대로 여실지견이라고) 했는데, 이제 공부가 좀 향상되니까 여실지견과 아빈냐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거지요. (즉, 딱까라는 내면의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여실지견이고, (염오를 해서 찟따의 ‘행위’ 과정을 모두 제어하면 이제) 아빈냐(실다운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행위’ 영역의 문제를 끝내고) 이렇게 존재의 ‘형성’ 과정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그 상태까지 온 아빈냐, 아비자나띠의 단계가 있고, 이 상태에서 마무리로 나아갑니다. 사마타로 탐을 제거하고 위빳사나로 번뇌를 제거해서 무명을 버리는 요 마무리 과정을 끝냅니다. 그러면 번뇌와 무명이 완전히 끝나서 삶이 완성되고, 이 상태의 지혜를 빠린냐, 그때의 인식하는 작용을 빠리자나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개념은 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수행을 통한 삶의 향상 과정으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뒤에 또 한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이렇게 위자나띠라고 하는 인식과정이 빤냐와 함께 하는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향상합니다.

* ①삼마빤냐(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알아야한다(보아야 한다)는 여실지견, 이 여실지견으로 딱까라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 그 상태에서 염오해 가지고 행위가 완전히 제어된 사띠토대(사념처에 잘 확립된 마음(찟따)의 상태)가 되면

* ②이제 비로소 존재의 형성 과정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아빈냐, 아비자나띠가 된 거에요.

* ③그리고 그 내면의 문제까지를 완전히 풀면 빠린냐, 빠리자나띠, 이렇게 완성이 되는 거예요.


이 아빈냐, 빠린냐를 구분하는 일도 사실은 중요해요. 지난 주인가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한번 했지요. 오아시스를 발견해서 우물을 찾았는데, 목마른 자가 우물이 있다는 것을 보는 것만 가지고는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지요. 우물을 찾았다는 것은 여실지견이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두레박을 잡고 물을 떠서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빠린냐라고 하지요. 자, 그렇게 하여 49번 경을 마쳤고요.


(이하는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