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인식의 단계
vedanāsuttaṃ (SN 47.49)[수(受) 경(http://cafe.naver.com/happybupdang/13263 )]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7초 ~ 6분 15초)
이런 이야기를 좀 보려고 합니다. 자, “세 가지 경험이 있다. 즐거운 느낌의 경험, 괴로운 느낌의 경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험”이라고 했어요.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요?
육내입처(가), 육외입처(를), 위자나띠(하면, 이것은 일차인식하는 것이지요). 여기(위자나띠)에 찬다라가(욕탐)가 간섭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식(識)이 새끼쳐지는데, ‘내입처, 외입처, 식’, 세 가지가 동시다(함께 만나는 것이다)하는 것을 ‘삼사화합촉이다’ 라고 말하지요. ‘촉(觸)하면 수(受)가 생긴다, 수라는 것은 낙, 고, 불고불락의 세 가지다.’ 이지요.
최근에 서울 법회에서 좀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보면 수를 느낌이라고, ‘느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내입처가 외입처를 인식한다, 감각해서 분별해 알면 외입처에 대한 앎이 생겨나고 이것이 마음이다(식). 그 상태에서 셋(내입처+외입처+식)이 만나면 ‘아, 지금 내가 인식한 대상이 무엇이다.’ 라고 아는 상태에 이어서, 그 감각한 대상을 보았다 들었다 하는 이 작용에 의해서, 거기서 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경험된다.’ 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외입처에 대한 느낌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입처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인지하는 이런 일차인식의 결과로 ‘아, 보았더니 알았어. 그랬더니(그것을 알아가지고는) 나한테는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어. 나는 너를 보아 지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즐거워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즐거운 느낌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 때문에 생겨나는 즐거운 느낌을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어’ 라는 이이야기이지요. 수(受)를 느낌이라고 번역(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자고요. 그래서 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불고불락의 느낌을 “경험”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경에서는 이런 세 가지 경험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사념처를 닦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완전히 안다’라고 해서 ‘빠린냐야’ 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빠린냐야라는 이 단어는 ‘빠리자나띠’의 abs(절대사, 또는 동명사)입니다. ‘자나띠’가 ‘알다’이고, 거기에 ‘빠리’-‘완전한’이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빠리자나띠’는 ‘완전히 알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빠린냐야’는 ‘완전히 알다(빠리자나띠)’ 라는 말의 절대사(또는 동명사)이다, 이렇게 되요. 그래서 ‘빠린냐야’라는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하면 “완전히 알기 위해서”, 이렇게 해석이 된 거예요. 참고로 위자나띠에서 자나띠는 알다이고 ‘위’는 ‘분리, 분별’이므로 위자나띠는 분별해서 안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놓고 우리가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지만, ‘자나띠’(알다)라는 동사에 대해서 첫째로 어떤 단어가 나오는가 볼게요. ‘위자나띠’에서, 아는데 어떻게 아는가 하면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위자나띠를 ‘인식한다’ 라고 우리가 해석을 하고 있는 거지요. ‘분별해서 안다’, 그래서 일차인식과 이차인식의 자리에 위자나띠가 쓰이는 거지요.
6분 16초 ~ 12분 46초)
그런데 이렇게 아는 데, 이 아는 것을 그냥 마음 혼자 알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현재 상태가 어때요? 욕계중생의 마음이잖아요. 욕계중생의 식(識)이 아는 일을 해서, 함께 하는 욕탐, 무명, 탐, 진, 치. 이것 때문에 계속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래서 마음을 도와서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 기능이라는 것이 있지요. ‘믿음, 정진, 사띠, 사마디, 빤냐’. 다섯 가지이지요. 그 중에 아는 일을 하는 이 자리(식의 자리)에서 마음을 도와서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 기능이 무엇인가 하니 빤냐(지혜)라는 거지요.
위자나띠는 식이 분별해서 아는 것, 인식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식) 네 혼자 해라.’, 이렇게 해 가지고는 삶이 좀 고달퍼지니까 ‘야,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서 지혜라는 것을 만들어서, ‘마음아, 내가 너를 도와 줄게.’ 이렇게 붙여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아까 시간에도 보았지만 이 빤냐 라고 하는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 삶에 잘 없죠. 왜 없죠? 빤냐를 무력화시키는 다섯 가지 장애라는 것이 나의 심(心, 찟따)을 장악하고 있으면 이 빤냐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장애를 밀어내는 만큼 빤냐가 힘 있어지지요. 힘 있어진 빤냐가 식(識)을 도와가지고 어떻게 해요? 인식하는 이 상황을 욕계중생 수준(소유적인 삶의 수준)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거지요.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색성향미촉) 이 다섯 가지에 대해서 ‘내 것 할 거여.’ 라고 이렇게 작용되고 있는 상태가 욕계 중생의 상태인데, 그러니까 그런 상태를 좀 벗어나서 삶을 향상하자 라고 하면 빤냐라는 이것이 도와주어야 됩니다. 어떻게? 사념처에 의해서 힘 있어진 빤냐가 이런 인식 작용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참으로 이렇게 인식되는 대상들을 ‘내 것이여’ 라고 붙잡아 가지고는 삶이 고달퍼지지요. 이것이 욕계중생 수준의 삶입니다. 일단 이것을 넘어서야 하지요. 그런가 하면 그것을 넘어선 다음은 무엇인가요? 몸과 마음이라는 나에 대해서 ‘몸가 마음이 나여.’ 라고 나라는 존재를 세워서 붙잡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신견(有身見)이지요. 나라는 존재를 붙잡아 가지고 삶의 동력으로 삼는 이것을 색계중생이라고 하지요.
거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어떻게 되나요? ‘몸이라고 하는 이것, 뭐 별 것이 있어, 백년이면 갈아야 하는데. 이 마음이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변치 않는 본질적인 나이지.’ 이렇게 ‘마음이야 말로 나의 자아여’ 라고 마음을 붙잡는 이런 수준의 삶을 무엇이라고 하지요? 무색계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런 삶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내 삶에 괴로움을 결과 맺죠.
그래서 부처님은 존재의 실상을 보아라고 해서 ‘무상∙고∙무아∙부정’이라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고 오온 모두에 대해서 말을 해주지요. 무아상응 경을 아시지요? 온(蘊) 상윳따에 나타나는 많은 경전의 요점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해서, 나를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념처를 닦아서 장애를 밀어내면서 지혜를 힘 있게 하는 만큼, ‘아 보니까, ‘에구, 내가 정말로 지혜가 힘이 없어서 이렇게 욕계중생 수준으로 살아가려니까 ‘이것은 내 것이여’ 라고 붙잡고 살아가는구나.‘ 라고 알아서 이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거지요, 빤냐의 힘으로.
조금 더 올라가서는 몸과 마음이라는 이 상태에서 몸이 참으로 나인 줄 알고 이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이것도 내려놓아야 하지요,
거기에서 빤냐가 더 힘이 있어지면 이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나의 자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야.’ 라고 내려놓는 일을 통해서 완성으로 가는 거지요. 이렇게 지혜라는 것이 사념처의 도움으로 힘이 있어져 가지고, 이제 인식하는 요 자리에 참여하는 거지요. 하여간 마음(識)을 도와 가지고 함께 인식을 하고, 그 인식의 단계가 단계적으로 올라가요.
(12분 47초 ~ 21분 19초)
자, 이때에 여기서 이런 말이 나타나요. 위자나띠는 기본적으로 ‘분별해서 알다, 인식한다’는 뜻이지요. 여기에 인식한다의 두 번째 단계로 지혜와 함께 하는 그 상태에 ‘삼마빤냐’라는 말이 나와요. 요게 뭔가 하면 ‘삼마’가 ‘바른(正)’이고, ‘빤냐’가 ‘지혜’니까 ‘삼마빤냐’는 ‘바른 지혜’, 이렇게 나타나요. 그런데 바른 지혜라는 이 말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하면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설명하는 무아상응 경을 비롯한 온(蘊) 상윳따의 많은 경전에서 계속 그 이야기를 하지요.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하면서, 그 자리에서 나오기를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라고 하는 그 자리에 바른 지혜가 나타나요. 그래서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본다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여실지견’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사념처 수행이 계속 진행되니까 지혜가 바른 지혜보다도 더 진행됩니다. 참고로 첫 번째는 위자나띠(분별해서 안다, 인식한다)였고, 두 번째가 삼마빤냐(바른 지혜)였지요. 어쨌든 바른 지혜(삼마빤냐)는 완성 상태가 아니에요. 여실지견을 우리가 개념적으로 말하면 딱까라는 내면의 방의 문을 여는 거지요. 거기까지 간 상태를 삼마빤냐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조금 더 발전하면 세 번째로 ‘아비자나띠’라는 것이 나와요. 여기서 ‘아비’는 본래 의미가 ‘높다(높은, 수승한)’이고 ‘~에 대한’의 뜻도 있습니다. 참고로 ‘아비담마’를 말할 때 ‘법에 대한’, 이렇게 일반적으로 봐야 하는데, 또 많은 쪽에서는 ‘수승한 법’으로 보는데, 그것은 ‘아비’라는 말이 ‘~에 대한’의 뜻도 되고 ‘수승한, 높은’의 뜻도 되기에 그렇지요. 그러나 아비담마에 대해서는 ‘법에 대함’ 으로 보는 것이 맞는 거지요.
그런데 아비자나띠 라고 할 때는 무슨 뜻인가 하면 ‘자나띠(알다)’라는 동사에 ‘아비(수승한, 뛰어난)’가 더한 말입니다. 그런데 뛰어난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실답게 안다’라고 번역을 하고 있죠. 오늘 제가 나중에도 말씀드리겠지만, 그러니까 여실지견이라고 말하는 이 상태하고 아비자나띠라는 말이 조금 차이가 있다는 부분을 말하고 싶어요. 하여튼 여실지견은 실답게 안다는 단계로 나아가요. 그런데 이것(실답게 안다)도 사실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에요.
실답게 안다는 상태에서 지혜가 조금 더 힘 있어지면 마지막 한 단계가 남아 있어요. 네 번째로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빠리자나띠”에요. 그래서 빠리자나띠를 우리가 ‘완전히 안다’로 번역을 하지요. 완전히 안다는 것은 이제 그야말로 아는 일이 완성된 거예요. 완전히 아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지혜가 완성된 거예요.
자, 이것을 놓고 보면, ‘(1) 위자나띠, (2) 삼마빤냐, (3) 아비자나띠, (4) 빠리자나띠’ 입니다. 이제 지혜의 측면에서 볼 때에 (1) 위자나띠는 기본적으로 ‘인식하다, 분별해서 안다’는 것이고, 그냥 감각 작용이예요. 그런데 여기에 사념처에 의해서 빤냐(지혜)를 만들어서 식(마음)을 도와주는 그 영역이 하여간 여기서부터 수행을 통해서 빤냐가 생겨나는 거지요, (2)번부터 (4)번까지, 전체적인 빤냐를 놓고 이제 단계가 세 단계로 설정되는 거예요.
첫 번째로 이 빤냐의 일차적인 완성상태가 어디인가 하면 ①‘삼마빤냐(바른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고 여실지견을 경전은 수도 없이 반복해주죠. 여기에 분명히 ‘삼마빤냐’가 쓰이지요.
그런가 하면 ‘아비자나띠’라는 실답게 안다는 이 상태는 지혜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제시될까 하면, 여기에 두 번째로 ②‘아빈냐(실다운 지혜)’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 법우님 중에 법명이 아빈뇨인 분이 있지요. 이반뇨는 아빈냐의 주격이지요.
그리고 이제 완전히 알았다고 하는 이것(빠리자나띠)은 지혜의 측면에서 볼 때에, 완전히 알려면 완전한 지혜가 식과 함께 해주어야 합니다. 완전한 지혜라는 이 자리가 그대로 ③‘빠린냐(완전한 지혜)’입니다. 아까 보았던 빠리냐나는 빠리자나띠의 절대사(또는 동명사)의 격변화(?)이고, 그 안에 빠린냐(완전한 지혜)라는 요 말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거지요.
그래서 지혜라는 것이 이렇게 수행의 발전 과정에 의해서 ‘삼마빤냐(바른 지혜) → 아빈냐(실다운 지혜) → 빠린냐(완전한 지혜)’, 이렇게 단계적으로 진행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위자나띠는 식이 혼자 인식한다는 개념으로 보아서 ‘에구, 중생의 인식 수준이 이렇다.’ 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제 위자나띠의 문제를 해소하자고 하니 삼마빤냐(바른 지혜)로 여실지견까지 가서 문을 열고 → 문을 열어서는 딱까라고 하는 내면의 방 안을 청소하는 과정은 실다운 지혜(아빈냐)까지 가서 실답게 알고 → 완전한 지혜(빠린냐)까지 가서 완전히 앎으로써 삶이 완성된다는 이런 개념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삼마빤냐-□, 이 자리에는 동사로는 잘 안 나타나는 것 같아요. 삼마빤냐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개념으로 나타나고, 아빈냐-아비자나띠, 빤냐-빠리자나띠, 이렇게 대응해서 ‘인식하다’-‘지혜’라는 것이 함께 설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