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폭류, 속박 / 견해
▣ (S47-43)[견해-흐름-폭류-속박](부산 수행 170328)
[동영상] ☞ https://youtu.be/ZVt4lyPAZbw
도 경(S47:43)(http://cafe.naver.com/happybupdang/13257)은 부처님 깨달음의 초기에 사념처가 방법을 얻기 위한-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는 경전입니다. 이 경의 말미에서는
‘ekāyanaṃ jātikhayantadassī, maggaṃ pajānāti hitānukampī. etena maggena tariṃsu pubbe, tarissanti ye ca taranti oghan’”ti.
“태어남의 부서짐의 끝을 보는 자 이익과 연민을 위하는 유일한 길을 안다.
이전에도 이 길을 따라 폭류를 건넜고, 이 길을 따라 건널 것이며 건너도다.”
라고 게송을 읊는데, 이번 수업에서는 이 게송에 주제어인 폭류[ogha]에 대해 메커니즘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 이상은 해피스님의 수업보고서에서 인용했습니다.
(이 글은 해피스님의 위 동영상 법문을 조금 녹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듣고 잘못 적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7분 30초 ~ 11분 3초)
폭류를 좀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오가(ogha), 이것을 폭류(瀑流)라고 번역했어요. 흐름은 흐름인데 막 거대하게 흘러가는, 커다란 장마철에 흐르는 강물, 이런 식으로 보면 되겠지요. 그런데 오가는 네 가지로 나타나요. 첫째는 까마+오가로 소유의 폭류입니다. 그리고 까마라는 것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존재라는 개념이 나오겠지요. 그래서 두 번째는 바와+오가로 존재의 폭류입니다. 그 다음에 딧티+오가로 견해의 폭류입니다. 그 다음에 아윗자+오가로 무명의 폭류입니다. 그러니까 ‘소유의 폭류, 존재의 폭류, 견해의 폭류, 무명의 폭류’, 이렇게 네 가지로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이제 이 폭류의 네 가지를 동일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어요. 요가(yoga)라는 것이 있거든요. 요가가 무엇인가요? 이것이 저기 요가 센터가 있잖아요. 사실 이 요가라고 하는 것이 수행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또 하나의 의미를 가져요. 바로 요가를 ‘속박’이라고도 번역을 해요. 즉 요가는 ‘수행’ : ‘속박’으로 번역을 합니다.
그래서 요가 센터라고 말하면 이것이 단순히 그냥 건강을 돌보는 이런 자리가 아니고, 따지면 인도식의 수행 센터인 거예요. 속박이라고 할 때에도 폭류에서 본 것처럼, ‘까마+요가, 바와+요가, 딧티+요가, 아윗자+요가’, 이것이 똑같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폭류라고 하는 것은 개념적으로 보면 속박하고 같은 개념으로 쓰이는 거예요.
속박, 이것이 무엇인가요? 중생이 해탈하려고 하면 ‘가긴 어딜 가니? 그냥 중생으로 살아.’라고 발목을 잡는, 족쇄라는 개념과 같은 거지요. 폭류도 그렇게 쓰여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것이 좀 재미있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요.
(11분 4초 ~ 15분 56초)
자, 기본적으로 소유와 존재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중생의 삶을 말할 때 소유의 삶, 존재의 삶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까마-욕(慾)-소유이고, 바와-유(有)-존재이잖아요. 그런데 중생의 삶이란 것은 ‘탐 진 치’를 조건으로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탐 진 치 때문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면 태어나야 하고 늙고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 가지 법 경이라는 경전에서 보면 부처님이 출현하는 조건이 무엇인가요? ‘생, 노, 사’라는 세 가지 조건으로 부처님이 출현하신다고 해요.
무슨 이야기안가 하면 ‘생∙노∙사’라고 하는 이 문제가 없으면 부처님이 출현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달리 말하면 다른 모든 문제는 부처님이 아니어도 해결이 가능할지 몰라도, 태어나야 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늙고 죽어야 하는, 이 생∙노∙사라는 세 가지 문제는 부처님 말고는 해결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럴 때 생∙노∙사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요? ‘탐, 진, 치를 조건으로 한다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를 어떻게 말하나요? ‘존재의 삶을 실현하자.’라거나 에리히 프롬처럼 ‘소유냐 존재냐’라는 이런 영역을 불교 공부의 본질로 말하지 않죠. 불교 공부의 본질은 이러한 소유와 존재라고 하는 중생의 삶에서 벗어남을 공부의 본질로 하지요. 그래서 소유의 삶, 존재의 삶에서 벗어남이 실현되면 이것을 ‘해탈된 삶이다, 열반이다.’ 라고 알려주는 거잖아요.
그러면 (소유의 삶과 존재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죠? 여실지견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 여실지견은 무엇인가요? 존재의 실상을 알고 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고 하는 존재의 실상을 알고 보는 이 일을 통해서 (벗어남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래서) 이런 중생으로의 소유적인 삶이나 존재적인 삶과 같은, 탐진치를 조건으로 생과 노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보면 폭류라는 것은 중생의 삶의 자리, 즉 까마와 바와, 이 두 가지를 우선 말해주죠. 그래서 ‘아, 중생인 소유적 삶의 영역에 속하는 소유적 폭류가 있고 마찬가지로 소유적 삶의 영역에 속하는 소유적 속박(요가)이 있고, 존재의 삶인 바와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의 폭류와 존재의 속박이 있다.’ 이 두 가지가 우선 설명되는 거지요.
(14분 57초 ~ 18분 50초)
그런 가운데 그러면 견해와 무명은 무엇일까? 라고 보면, 이러한 중생의 삶이란 사실은 중심에 무엇이 있나요? 딱까라는 것이 있잖아요. 우리 내면에 방이 하나 있지요. 이 딱까가 무엇인가? 하면 갈애를 형성하는 작용입니다. 갈애의 형성 과정이지요.
이 갈애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볼게요. 일차인식에서 생겨난 식(識)이 함께 생겨나는 수(受, 삼사화합촉해서 생겨나는 수)를 이차인식을 하죠. 이 이차인식을 할 때 여기에 간섭하는 것이 상(想)이지요. 이 상이 병들었다라고 하면 번뇌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중생의 삶으로 간섭하는 것이지요. (한편,) 이러한 상은 치유될 수 있지요.
중생의 삶은 병든 상이 번뇌로 이차인식에 간섭하면 여기서 무명(無明)과 그 위에 탐(貪)이거나 진(嗔)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지요. 그리고 이것이(여기에서) 식과 탐이 함께 하는데, 식이 이차인식을 통해서 탐을 만들어서 몸집을 부풀리면 이런 상태가 앎이기도 하고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심, 心)이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이 심(心)이 딱까 내부에서 내적인 행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는 내적인 행위를 하면 거기서 난디가 생겨나죠. 그리해서 이 탐과 난디가 함께 한 이 상태를 갈애(渴愛)라고 정의하는 거지요.
이렇게 갈애 상태가 되면 이제부터는 찟따 자체가 행위하는 마음이니까 행위를 하죠. 그런데 이 찟따가 하여간 갈애 상태가 되었지만 행위를 하는데 두 갈래 길로 나간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요.
법우님, 여기 두 갈래 길이 어떤 것인가요? 기억나시나요? 기본적으로는 위딱까가 있지요. 아까 완전한 위딱까를 질문하셨는데 쉽지 않은 문제이지요. 어쨌든 위딱까로 한 길이 오면 위딱까는 ‘의도-기대-지향’을 거쳐서 사유(思惟)로 연결이 되지요. 그런가 하면 한면으로는 위딱까 말고 어떤 길이 있나요? 예, 견해가 있지요.
그래서 사유라는 것은 ①견해라는 한쪽과 ②위딱까를 거쳐 오는 또 한쪽(이 모인 것임). 이래 가지고 (사유는) 마음이 몸과 함께 하는 상태, 즉 의업(意業)이 되는 것이죠. (칠판에서 해피스님께서 그림을 그려 설명하신 것을 참조하세요.)
(18분 51초 ~ 22분 54초)
자, 여기까지를 놓고 보면 이것이 한 가지 좀 재미있는 게 있어요. 우리가 좀 전에도 여실지견에서 지(知)와 견(見)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한때 지견에 대한 공부를 좀 했죠. 그것이 참 어려운 주제인데 이렇게 설명이 되면 좀 쉬울 것 같아요.
심(心)이라는 것이 난디와 함께 해서 갈애가 되었어요.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행위하는 마음이에요. 그런데 행위한다는 이것은 그 앞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식을 생겨나게 하는 일차인식이 있는 거죠.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감각해서 식을 만들지요. 그런 상태가 진행되었고 (이후의 과정을 거쳐 찟따가 형성되었는데 찟다는) 기본적으로 (견해와 위딱까의) 두 갈래로 나왔지요.
견해라고 하는 이것은 행위를 하려니까 일단 보잖아요. 견해라는 것은 행위 자리에서 눈입니다. 딱까라는 내면의 방에서 어떤 어떤 과정이 진행되어 갈애가 형성되거든요. 이 갈애가 이제부터 세상을 살아가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하나 있는 거예요. 그 눈이 견해다, 이렇게 보자고요.
그런가 하면 위딱까에서부터 의도-기대-지향을 거쳐 사유로 오는 이것은 뭐죠? 이것은 사실은 일차인식이, 즉 내입처하고 외입처 하고 이 감각과정의 전개가 중간에 수(受)를 대상으로 하는 내면의 방을 거쳐, 다시 외입처라는 감각 대상으로 되돌아와서 외입처한테로 의도-기대-지향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가는 거잖아요.
이것을 보면 갈애라고 하는 딱까의 결과물이 이제 세상을 살아가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견해이고, 이런 견해(눈) 위에서 일차인식이라는 처음에 내가 감각한 그 대상한테 구체적으로 행위를 하는 과정이 더해지는 거지요.
행위를 하는 데도 분명히, 법우님. 우리가 동일한 대상을 만난다고 해도 그 사람이 자기 내면에서 어떤 상(想), 어떤 번뇌를 작용시키는가에 따라 똑 같은 대상일지라도 달리 보는 행위를 하잖아요.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있지만, 그 사람을 본다는 것이 이 눈으로만 직접 보는 것은 아니잖아요. 마음이라고 하는 것, 세상을 보는 어떤 눈이 있어요. 이것을 견해라고 하는 거지요.
자, (칠판에서) 요런 과정에서 행위의 출발자리에서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눈이 하나 튀어나온 거예요. 그것이 견해입니다. 그런 가운데 일차인식에서 원래 대상인 외입처한테로 대상을 되돌려서 (칠판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 이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눈으로 보는 가운데 구체적인 행위 과정입니다. 이 눈(견해)과 행위(행위과정 : 위딱까, 의도-기대-지향)가 합쳐져 가지고 사유가 되는 거지요. 이런 개념으로 견해라는 것을 이해하면 좀 명확해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