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장구 제1장, 간단히
中庸章句
中者는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이요 庸은 平常也라
중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과와 불급이 없는 것의 이름이요, 용은 평상이다.
(나의 이해 : 중(中)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지나침이 없고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의 이름이요, 용(庸)은 평소에 (알맞은 그 자리에) 늘 그대로 있는 것(몸의 행위, 말의 행위, 마음∙생각(意)의 행위)이다.)
(나의 생각 : 중은 불편불의 무과불급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용은 평상시에 늘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했음. 그렇다면 중은 ①어떤 이치일 수도 있겠고, ②마땅히 사람으로서 완성해야 하는 목표점이거나 그런 경지일 수도 있겠음. 그럼 용은 무엇일까? 용은 ①그런 이치가 사람에게 바르게 드러나는 것이거나 ②삶을 완성한 사람(성인, 성자)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일 수도 있겠음.)
(‘중용장구 제1장 원문과 해석’은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복사해서 제가 편집한 것이고, ‘강의 필기’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운영하는 사이버서원의 중용장구 강의를 듣고 제가 대충 일부를 필기한 것이며, ‘나의 이해’는 제가 책을 읽고 강의를 들은 것과 불교에서 배운 것 등을 섞어 이해해본 것입니다.)
중용장구 제1장 원문과 해석은 여기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blog.daum.net/kang38103/465)
* 이 글에서 오류나 오타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가 잘못 듣고 제가 잘못 적었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강의 필기 : 중용은 어렵습니다. 중용장구에서 장구란, 주자가 한편으로 되어 있는 문장을 독창적으로 장과 구로 만들어 강목으로 만든 것이고, 대전은 영락대전 본이라는 뜻입니다.)
1. 天命之謂性이요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
하늘이 명(命)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性)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
(강의 필기 ; 하늘이 (인간에게) 명한 것을 성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는 것은 천성이라고 함. (그래서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여 본성이라고도 함), 심성은 성이 아직 외물에 저촉되지 않아 발양되지 않은 것, 심성이 외물과 저촉하여 발현되어 나오면 성정이라고 함) 본성을 따라 행하는 것을 도라고 하고, (성도 알고 도도 알았으면 그 본성 따라 인도(人道)대호 행해야 하는데 등급에 맞게 조절해야 하는 것(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를 제재를 해서 절제하는 것)을 교(가르치는 것)라고 말한다. (사람이라면 사람의 길을 가야지 짐승의 길을 가면 안 된다.))
(나의 이해 : ‘하늘이 명령하는 것’을 ‘성품’이라 이르고, ‘성품을 따르는 것’을 ‘걸어가는 길’이라 아르고, ‘길을 걸어감을 닦는 것’을 ‘가르침을 배움’이라 이른다. 지금 여기서는 ‘천명’을 어떤 뜻으로 썼는지, ‘성, 도, 교’를 어떤 뜻으로 썼는지 아직 알 수 없다.)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니 可離면 非道也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도(道)란 것은 수유(須臾)『[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이러므로 군자(君子)는 그 보지 않는 바에도 계신(戒愼)하며 그 듣지 않는 바에도 공구(恐懼)하는 것이다.
(강의 필기 : 본성대로 따라 행하는(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내 몸에서) 떠날 수가 없으니, (그리서 도가 인(仁)이고 도가 이치이고 ...) (도가 내 몸에서) 떠날 수 있으면 (떠날 수 있다고 여기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덕을 완성한 군자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조심하고 사람들이 듣지 않는 곳에서 조심할지니라.) (경(敬)은 1공경한다, 2집중한다, 3조심한다 의 뜻이 있다.)
(나의 이해 :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은 (사람이)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걸어가야 할 그 길에서) 떠날 수 있다면 (그런 길은) (사람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이 아니다. 이러므로 (덕이 있는 사람인) 군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이 그릇된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의 행위와 말의 행위와 마음∙생각의 행위를) 경계하고 삼가며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의 행위가 나쁘고 악한 행위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남에게도 부끄럽지 않도록) (작은 허물에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莫見(현)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니라
은(隱)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미(微)보다 나타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
(강의 필기 : 견으로 읽지 말고 현으로 읽으세요. (사람들이 내가 안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자신의 은미한 것은) 어두운 곳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으며 하찮게 여기는 일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니, (시비선악을, 내가 옳은 일을 했는지 잘못된 일을 했는지 선한 일을 했는지 악한 일을 했는지 사람들은 못 볼 수도 있지만 자기 마음속의 시비선악을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더욱 조심한다.)
(나의 이해 1 : 삼매에 들어 마음속을 관찰하는 사람은 지혜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꿰뚫어 본다, 그래서 범부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현상들이 확연히 드러나므로, 덕이 있는 군자는 홀로 있을 때에도 깨어있고 삼가는 것이다.)
(나의 이해 2 : (어두운 곳에서는 잘 안 보이고 미세한 것들은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견(見)을 글자 그대로 읽어 보겠음. ((나의 나쁘고 악한 요소들은) (그 착하지 않은 요소들이) 숨어있는 곳에서는 보이는 것이 없으며 (그런 내 나쁜 요소들이) 미세한 부분에서는 나타남이 없으니, (덕을 완성한) 군자는 (그런 나쁜 요소들이 일어나서 자신을 퇴보시키지 않도록) 자신이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
(나의 이해 2를 수정함 : 막견은 막현으로 읽는 것이 바른 것 같다. 막은 ~말라는 명령문으로 쓰이지 않았고, 최상급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인 것이 맞는 것 같다. 어조사 어도 나오므로. 예) 莫大於四海-사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2017, 3, 18))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道)이다.
(강의 필기 : 사물에 응대하여 희노애락이 나옵니다. 희노애락이 아직 발로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하고, 희노애락이 발로되었는데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그래서 중은 이치이고 사리에 맞고 물리에 맞게 하는 것은 조화이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 만물의 큰 근본이요, (내가 태어난 본성대로 이루어주려고 하는 것이 중이요) 조화라는 것은 천하지물이 모두 달성해야 하는 도이다. (그래서 화는 인위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모두 노력해야 한다.) (중은 미발지성이니까 본체를 논한 것이고,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것은 현상론이다.) (그래서 조화는 내가 노력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조화를 이루면 가족이 조화를 이루고 가족이 조화를 이루면 이웃이 조화를 이루고 이웃이 조화를 이루면 나라가 조화를 이루고 나라가 조화를 이루면 만물이 순조롭다.)
(나의 이해 : 여기서 중의 의미는 말해졌다. 보지 않았고, 듣지 않았고, 냄새 맡지 않았고, 맛보지 않았고, 감촉하지 않았고, 마음에 떠오르거나∙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경험하지 않아 느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한다고. 그런데 눈, 귀, 코, 혀, 몸, 마음∙생각이 빛과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생각에 있는 것들을 각각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분별하고 생각하는데도,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했다. 그래서 중은 천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서 세상의 큰 근본이라고 했고, 화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환하게 알고 행위해야 하는 도라고 했다.)
致中和면 天地位焉하며 萬物育焉이니라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萬物)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
(강의 필기 : 대학과 중용의 어려움은 앞에서 한 것을 놓아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발과 기발을 알아야 합니다. 외물이 나에게 저촉되지 않았을 때에도, 나에게 저촉되었을 때에도 잘 보아야 합니다.
중용과 조화를 지극하게 한다면 (천과 지의 사이에 인간이 있는데, 천과 지를 순조롭게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 천지가 정한 자리에 있어서 편안하게 되고,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있어서 각자 자기 자리가 있는데 그렇게 해주는 것이 인간이다.) 천지가 정한 자리에 있으면 만물이 제자리에서 생육하여 번성하게 된다.) (주인이 벼루를 아주 아꼈는데 어느 날 계집종이 그 벼루를 씻다가 그만 깨뜨리고 말았음, 계집종이 어쩔 줄을 몰라 울먹이자 주인이 말하기를, ‘어찌 물건으로 사람을 꾸짖을 수가 있는가, (네가 깨뜨릴 마음이 없는데도 그 벼루가 깨어졌으니 그것은) 그 벼루는 오늘 깨어질 날이었으니, 아무 걱정 말아라. 어서 가서 점심을 먹도록 하여라.’)
(나의 이해 : 아직 외물을 경험하지 않아 느낌이 일어나지 않았고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이때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눈으로 볼 때에도 깨끗한 마음으로 보아서 그 본 것이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좋은 것이더라도 법도에 맞지 않으면 그것들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나는 (표면의 행위의 영역에서는) 나 자신의 일을 다 하고 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내면의 영역에서 탐, 진, 치를 제거하여 명(明)이 일어나게 해야 하고 ...) 세상에 대해 만물에 대해 내가 달리 말할 것이 무엇 있겠는가. 만물은 만물의 이치대로 흘러갈 것이고 세상은 세상의 형편대로 변할 것이므로)